프랑스는 1999년 시민연대협약인 팍스(PACS)를 도입하며 모든 동거관계에 법적권리를 보장했다. 서류 하나만 쓰면 결합하고 갈라설 수 있는 느슨한 가족결합 방식인데, 나중에는 외국인 파트너에게도 배우자 비자를 발급했다. 팍스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을 이루는데 얽매이지 않는다. 프랑스는 팍스를 가족의 해체라고 보지 않았다. 새롭게 가족을 꾸리는 방법이라고 간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팍스와 비슷한 법의 발의시도가 있었다. 2014년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에서 추진된 '생활동반자법'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동거 관계를 조장하고 동성애자를 위한다”는 여론으로 발의에 실패했다. '외롭지 않을 권리'를 쓴 황두영 작가는 진선미 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며 생활동반자법 개발에 참여했다.  

팍스는 소득 세액 공제, 상속, 사회보장 급여 등의 혜택을 결혼관계와 동등하게 인정한다. 생활동반자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폭은 팍스보다 넓지 않다. 황두영 작가는 저서 '외롭지 않을 권리'에서 "법 초안이 공개됐을 때 몇몇 단체들은 아쉽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했다. 상속 및 입양, 친권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여타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즉,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두영 작가는 이미 가족 형태가 변화하고 있기에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외롭지 않을 권리’ 저자 황두영 작가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인가구수는 2000년 222만개에서 2017년 562만개로 증가했다. 2017년 기준 전체 가구 수의 28.6%를 차지하는 것이다. 중년 1인가구도 빠르게 증가한다. 45~54세 1인 가구는 2000년 24만 6000가구에서 2017년 89만 가구로 늘었다. 이처럼 가족 테두리 외의 개인이 늘어나는 추세다.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황두영 작가는 책 ‘외롭지 않을 권리’를 통해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생활동반자법은 혈연이나 혼인으로 맺어지지 않은 성인 두 사람이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국가에 등록하면 법적 가족에게만 허용됐던 사회복지혜택을 부여하는 제도다. 두 사람 사이의 자산 분쟁을 해결하는 틀도 제공한다. 

'새로운 가족'을 위한 권리 보장...악용 우려 목소리도

생활동반자법은 사회에서 소외됐던 이들이 잘 살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조성한다. 두 사람이 생활동반자로 등록하면 ▲대출을 승인하고 청약가점, 공공주택에 입주할 기회를 제공하는 주거권 보장 ▲수술 등의 의료결정권 ▲장례를 치를 권리 등이 위임된다. 

또한 동거인이 신체, 재산상 피해가 발생했을 때 손해배상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 한 명이라도 더 이상 생활동반자 관계를 원하지 않을 경우 법적 절차를 거쳐 관계는 종료된다. 재산 분할은 이혼 제도의 판례를 참고한다. 각자 번 돈은 각자의 재산이고, 같이 구축한 재산은 기여도에 따라 분할된다. 빚이 있다면 같이 책임진다. 황 작가는 책에서 “혼인관계와 달리 생활동반자는 관계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판례가 누적되면 생활동반자들 간 재산 분할도 차츰 가이드라인이 생길 것”이라고 전했다. 

생활동반자법이 청약가점, 공공주택 입주기회 제공 등 다양한 사회복지혜택을 보장하다보니 허위로 생활동반자를 등록할 수 있지 않냐는 우려도 있다. 황두영 작가는 책에서 “주거권은 모든 사람과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정책이 복잡하다”며 “향후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행정명령, 행정규칙, 계획, 조례 등 주거정책에 생활동반자를 어떻게 포함시킬지에 대해 논의, 개정,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전했다. 

“생활동반자법은 원하는 사람과 서로를 돌보며 살 기회를 국민 모두에게 더 넓게 보장하려는 법이다” -‘외롭지 않을 권리’中

[미니 인터뷰] '외롭지 않을 권리' 저자 황두영 작가

황두영 작가를 지난 17일 국회에서 만났다.
황두영 작가를 지난 17일 국회에서 만났다.

Q. 생활동반자법과 '결혼'제도의 차이는?

결혼은 이성간의 관계를 전제로 한 크고 무거운 ‘패키지’ 같은 제도다. 휴가·상속·명의 등 많은 책임·의무·혜택이 따라온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추세라지만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는 전제로 설계됐다. ‘유책주의’라고 해서 간통·폭력 등 배우자의 명백한 잘못이 있지 않으면 두사람 모두 합의해야 관계를 끊을 수 있다. 

반면 생활동반자법은 결혼보다 가볍다. 한명이라도 같이 살아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관계를 종료할 수 있다. ‘회자정리’의 철학을 담은 법이라고 할수 있겠다.

Q. 책 ‘외롭지 않을 권리’에 생활동반자법이 ‘모두를 위한 법’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어떤 의미인가.

노인 동거 가구의 경우 한쪽이 사망하고 재산을 분담해야 할 때 동거인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제도적으로 호명되지 않은 관계라서다. 이때 생활동반자법이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탈시설·자립을 원하는 장애인을 위한 대안도 될 수도 있다. 장애인들은 가족과 단절된 경우가 많고, 이들 대부분은 시설에서 함께 생활한 친구에게 의지하며 자립을 준비한다. 그러나 사회복지제도의 제약으로 쉽지 않다. 혈연과 결혼만으로 가족을 꾸릴 수 있는 지금의 조건은 어떤 이들에게 가혹하다. 하지만 생활동반자법은 기존 법·제도로는 관계가 인정되지 않았던 사람 모두를 인정한다. ‘모두’를 위한 법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Q. 생활동반자법의 핵심은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이라는 대목도 있는데?

1인가구가 늘었다. 좋아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혼해 가족을 만들 수 없다는게 이유인 사람들도 있다. 외로워하는 사람이 많고 자살률, 고독사 문제도 심각하다. 보건복지부 ‘2019 자살예방백서’를 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58.6명이다. OECD국가 중 1위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치고 시장에서 제공되는 돌봄 서비스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기존 정부 정책들은 그런 부분들을 놓치고 있다. 획기적인 실험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법이 그 예다. 

Q. 생활동반자법이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는 대목도 있다.

‘대한민국이 망하니까 애를 낳아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누가 공감하겠는가. 출생은 ‘이 사람과 같이 살아보니 좋다’고 느껴야 나오는 장기적인 계획이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나 제도는 이것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장기적인 계획을 할 수 없는 환경이고, 출생률, 1인가구 증가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생활동반자법은 이 ‘틈’을 느끼게 하는 법이다. 친밀한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게 얼마나 즐겁고 좋은 일인지 체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생활동반자법이 반드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황두영 작가가 지난해 3월 출판한 '외롭지 않을 권리' 책 표지.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출처=시사인북.
황두영 작가가 지난해 3월 출판한 '외롭지 않을 권리' 책 표지.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출처=시사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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