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사회 시스템이 역량을 높이는지 원칙을 세우고 변형‧적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한 가지 치수는 아무한테도 맞지 않는다.”

지난해 말 협동조합 착한책가게에서 신간 ‘래디컬 헬프(Radical Help)’를 내놓았다. 책의 저자는 영국 출신 사회활동가이자 사회적기업가로, 현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공공혁신연구소 명예교수로 일하는 힐러리 코텀이다. 그는 지난달 22일 온라인을 통해 개최된 ‘독자와의 대화’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지난 2015년 TED 강연에서 ‘망가진 사회적 서비스를 고치는 방법’을 주제로 강연한 힐러리 코텀. 100만명에 육박하는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았다./출처=TED 강연 유튜브 썸네일
지난 2015년 TED 강연에서 ‘망가진 사회적 서비스를 고치는 방법’을 주제로 강연한 힐러리 코텀. 100만명에 육박하는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았다./출처=TED 강연 유튜브 썸네일

코텀은 새로운 복지제도를 디자인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전개해온 연구자이자 활동가다. 지난 2015년 ‘망가진 사회적 서비스를 고치는 방법’을 주제로 TED 강연에 나서 100만에 육박하는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2018년 영국에 처음 소개한 책에서 “전후 체제의 서비스는 한계에 다다랐으며, 복지 체계는 오늘날의 문제나 현대인의 삶과 어긋나 있다”고 지적하며 “서로 연결돼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관계적 복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출판사는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인사말을 부탁했으나, 코텀은 한국 독자들과의 대화를 직접 제안했다. 이날 행사는 책의 역자인 이태인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박경현 샘교육복지연구소 소장을 비롯해 사회복지‧사회적경제 분야 종사자들이 참여해 코텀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이날 나온 주요한 이야기를 질의응답 형태로 정리했다.


Q. ‘래디컬 헬프’에서 복지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나는 영국에서 ‘낙후된 지역사회’라 불리는 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후 유럽 전역과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 일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실천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땜질하는 방식으로 복지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와 에너지가 필요했고, 이러한 생각을 정리해 ‘래디컬 헬프’를 썼다.

1941년 영국 복지시스템을 창설한 ‘베버리지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재건을 꿈꾼 커다란 상상력에서 나왔다. 그러나 복지시스템이 처음 구축될 때와 완전히 다른 21세기 현 시점, ‘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대대적인 공론을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시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지원하고, 심오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왔을 때처럼 커다란 상상력이 필요하다.

2020년 말 출간한 ‘래디컬 헬프: 돌봄과 복지제도의 근본적 전환’ 한국어판 책 표지 이미지./출처=착한책가게
2020년 말 출간한 ‘래디컬 헬프: 돌봄과 복지제도의 근본적 전환’ 한국어판 책 표지 이미지./출처=착한책가게

Q.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가족, 청소년, 구직자, 환자, 노인’ 등과 함께한 실험을 책에 소개했다.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

▶국가가 복지시스템을 설계할 때 ‘요람에서 무덤까지’, 즉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잘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데, 나의 실험 역시 그 과정을 다뤘다. 다만 정부에서 급여를 받는 전문가들이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에서 다르게 일을 했을 때 변화가 일어남을 확인했고, 지역사회 안에서 협력 집단들이 전혀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사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기존 시스템 내에서 ‘가족’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다. 빚, 마약 등 여러 사회적 문제를 가진 위태로운 가족이 있는데, 이들은 보통 정부 시스템에 등록돼 경찰‧의사‧복지사 등 수십 명의 전문가들의 관리를 받는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내가 진행한 실험에서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역할을 재설계하고, 도움을 받는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원하는 시스템이 무엇인지 물었다. 정부가 가족의 삶에 개입해 무언가 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이들이 발전하는 길에 동행하도록 돕는 것이 실험의 핵심이었다.

많은 국가에서 ‘이게 좋은 생각이야’라고 결정하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 곳의 상황에 맞게 자리 잡은 아이디어가 모든 곳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시스템이 역량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지를 중심에 두고 원칙을 변형‧적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씨앗을 흙에 심었을 때 여러 조건을 더해 어떻게 다른 것을 재배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비전을 연결하고 공유할 수는 있지만, 각각은 매우 다르고 개별적이다. 한 가지 치수는 아무한테도 맞지 않는다.

Q. 실험의 결과처럼 앞으로의 복지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복지시스템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 알약을 하나 주고 ‘나라가 이것을 당신에게 주었으니, 이제 당신은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망가지면 일단 고치고 봐야 한다는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대신 나는 사람들이 번성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들이 무엇인지, 삶의 발전 경로를 생각해볼 것을 제안했다.

이 ‘역량 프레임워크’는 내가 번창하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같은 단순한 질문들이 자리한다.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내가 무엇이 될 수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좋은 삶’에 필요한 역량은 일하고 배우는 것이다.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개발해야 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좋은 공동체가 지닌 가치를 느껴야 한다.

전체 탑이 무너질 때까지 블록을 하나씩 빼는 ‘젠가’라는 게임이 있다. 관계는 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결코 빼서는 안 되는 그 블록과 같다. 주변사람, 지역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라는 블록을 빼낸다면 우리의 삶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복지를 설계할 때도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알아가게 할 것인가를 두고 모든 면을 고려해야 한다. 전문가들도 어떻게 하면 시스템에 맞게 움직이면서 열린 관계로 대할 것인가 하는 요소들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지난달 22일 '래디컬 헬프'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에 열린 온라인 '독자와의 대화' 행사에서 발언하는 힐러리 코텀./출처=착한책가게
지난달 22일 '래디컬 헬프'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에 열린 온라인 '독자와의 대화' 행사에서 발언하는 힐러리 코텀./출처=착한책가게

Q. 4차 산업혁명기를 맞아 사회복지와 디지털기술은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애초에 복지시스템은 전후시대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작됐다. 그러나 현재 복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아직도 과거 산업혁명 시기에 머물러 있다. 디지털 혁명기를 맞이한 지금, 기본부터 완전히 새로 계획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기술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서비스 구조를 확립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기술은 많은 돈을 창출하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복지에 투자할 수 있는 실질적 자원이 된다.

예를 들어 노인들을 위한 교통수단이나 장소 등은 늘 필요하지만, 자원은 한정적이다. 커뮤니티 안에서 어떤 사람은 차를 태워줄 수 있고 집을 빌려줄 수 있는데, 디지털 플랫폼을 잘 활용한다면 이들을 연결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의 시작은 언제나 기술이다. 다만 기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생각한다면, 언제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번영에 이르는 길은 늘 사람의 관계부터 시작된다. 

Q.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해 향후 사회복지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팬데믹 동안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돕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앱을 활용해 이웃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거나 차를 태워주는 등 비공식적으로 서로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영국인들은 각자 집안에 살며 이웃과 잘 대화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러한 변화에 깜짝 놀랐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이웃을 모른 채 할 수 없게 됐고, 사람들이 공동체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됐다.

또한 팬데믹을 통해 우리에게 심각한 빈곤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다시금 인지하게 됐다. 이는 앞서 전쟁 이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게으르거나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특정한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변화의 시작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힘 있는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옛날 방식을 고수하기를 원하고, 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언덕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많은 독자들께서 사회문제에 책임감을 갖고, 실천에 동참하는 파트너가 되어주시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큰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나도 정답을 모르고 우리 중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함께 일하면서 그 정답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착한책가게는 코텀과 진행한 독자와의 대화를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 ‘래디컬 헬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이날 진행된 역자와의 인터뷰, 독자와의 대화 등 구체적 내용이 궁금한 누구나 해당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