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제정한 노벨은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 분야는 물리, 화학, 생리의학, 경제학, 평화 등 5가지로 정했다.

노벨상을 과학자의 최고 명예로 여기는 풍토 속에서, 내가 속한 식물학 분야에 노벨상 수상자가 몇 명인지 궁금했다. 2020년까지 노벨상 수상자 962명 가운데 지금까지 식물과 관련된 분야로, 혹은 식물학자로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10명 정도다.

바바라 맥클린톡 (1902-1992), 뉴욕 콜드스프링하버 카네기 연구소 유전학과 실험실에 있는 맥클린톡. 사진=스미스소니언협회 아카이브
바바라 맥클린톡 (1902-1992), 뉴욕 콜드스프링하버 카네기 연구소 유전학과 실험실에 있는 맥클린톡. 사진=스미스소니언협회 아카이브

난쟁이 밀을 육종한 육종학자 노먼 볼로그는 과학상이 아닌 197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가 개발한 난쟁이 밀은 멕시코, 인도 지역에 작물 수확량을 늘린 ‘녹색혁명’의 주역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목격하던 전세계는 식량 부족을 직면했고, 그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난쟁이 밀은 세계 평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다. 한편, 2004년 노벨 평화상은 아프리카에서 나무를 심는 그린벨트 운동을 통해 숲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경제를 꿈꾼 왕가리 마타이에게 돌아갔다.

바바라 맥클린톡 (1902-1992), 뉴욕 콜드스프링하버 카네기 연구소 유전학과 실험실에 있는 맥클린톡. 사진=스미스소니언협회 아카이브
노먼 볼로그(1914-2009), 2003년 6월 미국 농업과학기술 박람회 당시. 사진=위키미디아 커먼즈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바바라 맥클린톡은 염색체 사이를 움직이는 전이인자(transposon)를 발견했다. 염색체를 고정된 실체로 바라보던 당시 학계에서 맥클린톡의 가설은 큰 파장을 일었다. 그녀는 전이인자를 1940년대에 옥수수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전이인자가 동물을 비롯한 다른 종에도 존재하는 것이 발견되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전이인자가 식물 고유의 현상이었다면 그녀가 과연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 지 확신할 수 없다.

식물 고유의 현상을 연구해서 노벨상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광합성을 연구한 과학자들이었다. 멜빈 칼빈은 1961년, 광합성 중 이산화탄소가 포도당으로 전환되는 과정인 칼빈 회로(오늘날에는 칼빈-벤슨 회로로 불린다)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1915년과 1930년에는 광합성 색소인 엽록소 연구가 화학상을 수상했다. 광합성은 동물과 인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식물 고유의 현상이지만,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의 에너지원을 만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광합성 관련 연구가 생리의학상이 아닌 화학상을 받은 이유일 터.

1998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기체인 이산화질소가 생체 호르몬으로 기능한다는 발견을 한 생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노벨 생리의학상 위원회는 ‘기체가 생체 기능을 바꿀 수 있는 호르몬 역할을 한다는 최초의 발견’이라며 수상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기체가 호르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식물에서 그보다 한참 전에 밝혀졌다. 기체 에틸렌은 식물의 생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과일의 숙성도 유도하는 대표적인 식물 호르몬이다. 에틸렌의 기능이 밝혀진 1930년대 이후, 과일을 덜 익은 상태에서 수송하고, 최종 목적지에서 남은 숙성 과정을 거치는 게 가능해졌다.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바나나는 에틸렌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현지에서만 즐길 수 있는 과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원예가들은 더 짙은 보랏빛을 띠는 페튜니아를 피우기 위해 당시에는 최신 기법인 유전자 재조합 방식을 통해 색소 유전자를 삽입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진보라색 페튜니아가 아니라 얼룩덜룩하거나 오히려 새하얀 페튜니아가 피었다. 추가로 삽입된 유전자가 이미 있던 유전자의 기능까지 억제할 수 있다는 이 기이한 관찰은 유전자 전사침묵(PTGS)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이후, 예쁜꼬마선충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발견됐고, 염기서열이 비슷한 DNA 혹은 RNA가 유전자를 억제한다는 가설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1998년,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하던 파이어와 멜로가 RNA 이중나선이 유전자 전사침묵을 일으키는 인자라고 밝혔다.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RNA간섭을 연구한 파이어와 멜로에게만 수여됐다.

노벨상 시즌이 끝났다. 내가 속해 있는 식물학계에서 올해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없다. 많은 이들이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기대하듯, 몸담고 있는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염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식물 고유의 현상을 연구하는 식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하기란 매우 어렵다. 식물 고유의 현상을 연구해서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실제로 지금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식물 분야는 인류를 위해 식량 생산량을 늘리거나, 인류에 도움이 될 약물 후보 발견 분야였다.

하지만 기체 호르몬이나 RNA 간섭처럼 많은 현상이 식물에서 연구가 시작됐다. 그리고 인간이 식물을 통해 얻는 수많은 유무형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노벨상을 받은 식물학자가 이렇게 적은 건 아이러니하다.

어떤 현상을 연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은 여러 과학자들 중에 ‘인류에 공헌을 한’ 부분을 연구한 이들에게만 노벨상을 주는 것도 그 가치와 모순된다. 하지만 사실 노벨상은 처음부터 뛰어난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노벨이라는 개인이 남긴 유언에서 시작된 상이다. 지금이라도 노벨상을 과학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는 누군가가 주는 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주어진 질문에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실험하며,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었을 때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성취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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