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환 감독의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책 표지 이미지.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는 유쾌한 할머니들'이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책 제목 9글자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칠곡가시나들'의 기획 의도이기도 했다./사진제공=북하우스
김재환 감독의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책 표지 이미지.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는 유쾌한 할머니들'이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책 제목 9글자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칠곡가시나들'의 기획 의도이기도 했다./사진제공=북하우스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나이듦’이라는 단어 앞에 ‘오지게’ ‘재밌게’라는 수식어가 붙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하나 같이 “그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이 들어 쇠약해진 80~90대 할머니들의 삶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있길래, 이렇게 생기가 넘치고 즐거운 걸까?

지난해 2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칠곡가시나들’의 김재환 감독이 영화 제작을 위해 3년여간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느끼고 경험한 생각들을 에세이로 담아냈다. 지난달 21일 출간한 신간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통해 그 비밀을 풀어낸 것이다. 출간 다음 날 만난 김 감독은 “할머니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일용할 설렘’이다”라고 답변했다.

‘칠곡가시나들’에 출연한 할머니들은 경북 칠곡군에 사는 평범한 노인들이다. 조금 특별한 점이라면 마을 문해학교에 다니며 뒤늦게 ‘한글 공부’ 하는 재미에 빠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할머니들이 아침 일찍 글을 배우러 마을회관을 찾고, 떨리는 손으로 느릿느릿 기역니은 글자를 쓰며, 그동안 읽지 못했던 시장 가게들의 간판을 읽는 모습 등이 비춰진다.

앞서 MBC 교양 PD로 일했던 김 감독은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 ‘미스 프레지던트’ 등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다. 70대 중반인 어머니가 “친구들과 까르르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에 전혀 다른 결의 ‘칠곡가시나들’을 만들게 됐다. 이번 책에는 김 감독이 “잘 웃고 잘 노는 칠곡 할머니들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담겨 있다.

김재환 감독을 지난 9월 서울 이로운넷 사무실에서 만났다. 신간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은 영화 '칠곡가시나들'을 촬영하며 80~90대 할머니들을 만나 느낀 생각과 감정이 따뜻하게 담겨있다./사진=유주성 인턴기자
김재환 감독을 지난 9월 서울 이로운넷 사무실에서 만났다. 신간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은 영화 '칠곡가시나들'을 촬영하며 80~90대 할머니들을 만나 느낀 생각과 감정이 따뜻하게 담겨있다./사진=유주성 인턴기자

 


-영화에 이어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요?

▶‘칠곡가시나들’ 개봉 때 전국 독립서점 곳곳에서 시사회를 열었어요. 영화를 보신 서점 사장님들이 할머니들께 전해달라고 그림책을 여러 권 보내주셨어요. 제가 그림책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는데, 할머니들도 정말 재밌게 보시더라고요. 할머니들이 쓴 시나 글을 모자이크처럼 엮어 그림책을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아 출판사에서 에세이를 쓰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았어요. 다행히 평소 좋아하던 주리 작가님이 그림 10편을 그려주셨고, 여기에 할머니들의 글과 말을 더해 책 속에 싣게 됐습니다.

-책에는 주로 어떤 내용을 담으려고 했나요?

▶영화에서 사람들이 더 알고 싶어 했던 내용이나 궁금했던 이야기들이 책에서 유쾌하게 해소된 것 같아요. ‘칠곡가시나들’을 관람하고 여러 관객께서 메일을 보내셨는데, 그 중 전국 문해학교 선생님들께서 편지를 많이 써주셨어요. 영화에서 87세 곽두조 할머니가 노래자랑에 나갔다 예선에서 탈락해 크게 충격을 받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87학번도 아니고 8학년 7반에게 예선 탈락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다들 하신거죠. 1년 뒤 문해학교 사람들이 곽두조 할머니를 꼬셔서 다시 노래자랑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는 뒷이야기를 책에 적었습니다.(웃음)

신간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에는 주리 작가의 그림 10편이 함께 담겨 있다. 해당 그림은 다리가 아파도 산에 나물을 캐러 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나물은 먹는 재미보다 캐는 재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나이가 들어서 친구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며 "가수 진시몬의 '보약 같은 친구'라는 노래 가사에 무척 공감했다"라고 말했다./사진제공=북하우스
신간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에는 주리 작가의 그림 10편이 함께 담겨 있다. 해당 그림은 다리가 아파도 산에 나물을 캐러 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나물은 먹는 재미보다 캐는 재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나이가 들어서 친구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며 "가수 진시몬의 '보약 같은 친구'라는 노래 가사에 무척 공감했다"라고 말했다./사진제공=북하우스

-개인적으로 김 감독님과 할머니들의 ‘관계성’이 드러난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2016년부터 서울과 칠곡을 오가며 3년쯤 영화를 찍었는데, 막바지에는 할머니들이 촬영이 끝날까 봐 조마조마해 하셨어요. 하루는 문해학교 반장인 박금분 할머니께서 “서울감독님, 촬영 언제 끝나요?”라고 물으시길래 ‘혹시 부담스러우신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더 이상 못 볼까’ 서운하셨던 겁니다. “끝나면 다시 안 올까봐” 울컥 눈물까지 흘리시더라고요. 촬영이 끝난 다음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내려가 할머니들과 밥을 먹었습니다. 최근엔 코로나19 때문에 마을회관이 닫혔고 저도 못 내려갔는데, 할머니들의 삶이 외로워진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까워요.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칠곡가시나들’을 찍고 나서는 ‘재미있는 게 의미 있는 것이다’로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고요?

▶저 역시 ‘나이듦’이라고 하면 부정적 감정이 먼저 떠올랐고, 그것에 대해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런데 칠곡 할머니들을 한분 한분 뵙고 나니까 나이듦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이 조금씩 녹아들더라고요. 특히 이분들이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오늘을 재밌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욕망을 가졌다는 거죠. 할머니들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살아보니, 그 재미가 차츰 보이기 시작했어요. KTX를 타고 가면 보이지 않는 시골 간이역의 즐거움을 포착했다고 할까요?

문해학교를 다니며 생애 처음 글을 익힌 할머니들은 '전혀 다른 일상'을 경험한다. 평균나이 86세, 1930년대생인 할머니들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에 소외당하며 살았다. 이들에게 한글을 배운다는 건 글자를 익히는 것 이상의 설레는 일이었다./사진제공=북하우스
문해학교를 다니며 생애 처음 글을 익힌 할머니들은 '전혀 다른 일상'을 경험한다. 평균나이 86세, 1930년대생인 할머니들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에 소외당하며 살았다. 이들에게 한글을 배운다는 건 글자를 익히는 것 이상의 설레는 일이었다./사진제공=북하우스

-노인도 ‘재미’를 추구하는 존재인데, 상대적으로 즐길 거리는 적은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젊은 세대의 눈으로 노인들을 볼 때 보통 ‘불쌍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비춰지잖아요. 실제로 이분들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사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아침 드라마 중 시대극 ‘TV소설’이 2018년 폐지됐을 때, 할머니들이 큰 충격을 받으셨거든요. 옛 추억을 돌이키고 이야기 나눌 소재를 던져줘서 어르신들이 정말 좋아하셨는데, 그 드라마가 없어졌을 때 세상이 너무 조용하더라고요. 예전에 ‘무한도전’ 같은 인기 예능은 한 주만 결방되도 시청자 게시판이 마비될 정도로 시끌시끌했거든요. 

코로나 시대에도 이분들이 겪는 정서적 충격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어요. 평생 사람을 통해 ‘대면의 즐거움’만 느끼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비대면 사회’로 살라니. 젊은 사람들이야 ‘넷플릭스’ ‘유튜브’를 보며 다른 즐거움을 찾겠지만, 어르신들은 다른 길을 찾지 못하세요.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잖아요. 지역의 문해학교나 사회적기업 등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밌게 나이들어가는 비법으로 ‘설렘’을 거듭 강조했는데요?

▶할머니들을 보면서 나이 먹어서도 ‘밥 먹듯이 설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노년의 기본적 정서는 ‘외로움’인데, 외로움을 떨치기 위한 온갖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거든요. 그런데 재밌게 나이 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니, 새로운 것을 배운다든지 안 해봤던 일을 시도한다든지 자신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를 꼭 찾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얘기하는데, 나이 들어서는 ‘설외밸(설렘과 외로움의 균형)’이 필요해요.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해독제는 설렘밖에 없으니까요.

칠곡 할머니들에겐 한글 공부가 ‘설렘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어요. 글을 배운 뒤 생애 처음 아들에게 편지를 써보고 자식들과 문자 메시지도 하고, 은행 업무를 보며 사인도 해보거든요. 문해학교는 단순히 한글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간단한 영어나 컴퓨터 사용법, 은행 이용법 등 세상과 발맞춰 사는 방법을 알려줘요. 저는 70~80대가 되면 다시 학교에 가는 법이 제정됐으면 좋겠어요. 이곳에서 정서적 돌봄과 새로운 교육을 받으며 설렘을 되찾는다면, 치매 등 의료비가 크게 줄어들 거예요. 아이들은 줄고 이미 학교는 많으니, 그 공간을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김재환 감독은 '칠곡가시나들'을 통해 "나이듦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얻은 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나이듦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요즘은 내가 할머니들처럼 아흔이 되면 어떤 재미를 따라 살고 있을지 자주 상상해보게 된다"고 이야기했다./사진=유주성 인턴기자
김재환 감독은 '칠곡가시나들'을 통해 "나이듦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얻은 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나이듦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요즘은 내가 할머니들처럼 아흔이 되면 어떤 재미를 따라 살고 있을지 자주 상상해보게 된다"고 이야기했다./사진=유주성 인턴기자

-설렘이 필요한 건 노년뿐만이 아닐 텐데요. 감독님을 설레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대학교 3학년이던 1990년 영국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룸바’라는 춤을 배웠는데, ‘이런 세상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에 돌아와 광화문 금융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며 근처 문화센터에서 댄스스포츠 강좌 회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곧장 찾아갔어요. 일주일에 3~4일씩 퇴근 후 댄스스포츠 배우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영화 ‘쉘위댄스(1996)’의 주인공인 평범한 샐러리맨 ‘스기야마’가 춤을 만나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사는 것처럼요. 

시기만 다를 뿐이지 20대 초반의 저와 중년 남성 스기야마, 칠곡 할머니들은 공통적으로 ‘설렘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한 경험을 한 겁니다. 예전에 열정적으로 췄던 룸바를 다시 배워볼까 요즘 고민하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최근 아코디언을 배우고 계신데, ‘체구도 작으신 분이 왜 무거운 악기를 하실까?’ 걱정하다가 그냥 열심히 응원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나이든 부모가 설렘을 찾아 나아갈 때, 자식들이 찬물을 제일 많이 끼얹거든요. 부모님을 설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도 좋은 효도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시대 효도는 전화가 알파요, 용돈이 오메가다’라는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설레게 할 수 있는 ‘꿀팁’을 알려주세요.

▶오랜 시간 할머니들과 저희 어머니를 지켜본 결과, 이분들은 늘 자녀들과 손주들의 연락을 기다리세요. ‘귀한 내 새끼들 시간 뻿을까 봐’ 먼저 전화 걸기는 어려워하고 연락해도 ‘빨리 끊자’고 답하시지만, 언제나 자식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세요. 그러니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하시되,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끔 응원하고 북돋는 말을 많이 해드리세요. 움츠리게 하거나 두려움을 심는 부정적인 말은 삼가시고, 자식들이 치어리더가 돼서 부모님을 설레게 만들어야 해요. 효도의 마지막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 역시 용돈이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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