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살인(honor killing)’, 집안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이슬람권의 관습은 현대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다. UN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5000여 명이 명예살인을 당하고, 비공식 피해자를 더하면 약 2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가족·부족·공동체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다.
영화 ‘세인트 주디’는 “자기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세계 3분의 2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정치적 위협은 보호하지만, 이슬람 여성이 겪는 위협은 보호하지 않는 미국이 ‘망명법’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한 변호사 ‘주디 우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정의를 향한 한 사람의 끈질긴 용기가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지 106분간 그 발자취를 담아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미국 캘리포니아 이민 전문 변호사 ‘주디 우드’가 미국에 망명을 요청한 아프가니스탄 여성 ‘아세파 아슈아리’의 변호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아세파는 소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탈레반에 의해 투옥되고, 미국 망명 제도를 통해 신변을 보호받고자 한다. 하지만 법원은 정치적 박해가 아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망명을 허가할 수 없다며 아세파를 본국으로 추방하려 한다.
하지만 주디는 아세파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되는 즉시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로부터 명예살인 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망명법을 뒤집을 변호를 맡는다. 망명 제도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은 사례가 없던 만큼, 불가능한 정의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주디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결국 아세파는 망명법에 의해 보호받게 되고, 이후 수천·수만 명의 여성이 목숨을 구한다. 누군가를 변호하는 것을 넘어 구원하는 모습을 본 주디의 전 남편은 그녀를 ‘세인트 주디(Saint Judy)’라 칭한다. 실제 주디 우드는 미국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프로젝트’를 이끌고, 인권 관련 사건에 30년 넘게 일하는 등 인생을 바치고 있다.
작품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여성 캐릭터와 그들의 끈끈한 연대를 통해 진한 여운을 준다. 아세파는 여성들의 교육을 막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녀들도 스스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하며 목숨 걸고 저항했으며, 주디 역시 평등의 사각지대에서 스러져가는 여성들을 위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법정 투쟁에 나섰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 나아가 인류를 위해 나선 두 여성의 서사는 감동을 자아낸다.
실제 사건을 긴장감 넘치는 법정 드라마로 완성한 데는 탄탄한 대본의 역할이 컸다. 주디 우드 법률사무소의 인턴이자 로스쿨 출신인 ‘드미트리 포트노이’가 각본가로 참여해 전문성과 진정성을 불어 넣었다. 주디와 아세파 역을 맡은 배우 미셸 모나한, 림 루바니의 호연도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끌어당기는 데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2020년 현재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인종 및 성차별 문제에 대해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세인트 주디’ 제작진들은 “여성 인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조명을 받고 인식 전환의 과도기에서 진통을 앓고 있는 지금, 우리가 반드시 재고해야 할 부분을 환기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보인 ‘망명법’을 허물고 바로 세운 주디처럼, 우리 사회 뿌리 깊게 박힌 각종 차별도 어쩌면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주 높은 산이라도 정상에 올라갈 방법은 있다”라며 뚝심과 인내를 보여준 주디와 아세파의 대사를 곱씹게 된다. 7월 29일 개봉. 숀 헤니시 감독. 미셸 모나한, 림 루바니, 커먼, 피터 크라우즈, 알프리도 몰리나, 알프리 우다드 등 출연.
사진제공. ㈜태왕엔터웍스, ㈜미로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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