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장남이 무슨 벼슬이에요?” 가부장제에 돌직구를 날리다
[리뷰] “장남이 무슨 벼슬이에요?” 가부장제에 돌직구를 날리다
  • 이로운넷=양승희 기자
  • 승인 2020.02.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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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모인 오남매의 이야기 담아낸 ‘이장’
국내외 다수 영화제 초청, 올해의 아시아영화 선정되며 주목
“세기말적 가부장 질서에 문제제기, 현실적 여성서사 그려내”

코로나19 확산으로 극장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난 지난 주말 21~23일 기준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70만 1120명으로 급감했다. 지난해 비슷한 기간(2월 22~24일) 관객 수 225만 5600명과 단순 비교해도 약 3분의 1 수준이다. 관객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2~3월 개봉 날짜를 정해둔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미루거나 관객 행사를 대폭 취소하고 나섰다.

‘결백’ ‘사냥의 시간’ ‘침입자’ ‘기생충: 흑백판’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이장’ ‘후쿠오카’ ‘나는 보리’ 등 상업‧독립영화 제작사들이 최근 언론시사회를 취소하고 개봉 날짜를 연기한다고 공지했다. 지난 2월 24일 오후 2시 롯데시네마 건대점 7관에서 언론시사회를 연 ‘이장’은 비슷한 시각 9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다녀간 사실이 밝혀져 안내 문자 및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당초 3월 5일 개봉일을 잡았지만, 개봉 날짜를 잠정 연기해둔 상황이다.

영화 '이장'은 아버지의 묘 이장을 위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오남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이장'은 아버지의 묘 이장을 위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오남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버지 묘를 이장(移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큰아버지 댁에 모인다. 연락두절이 특기인 막내 남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네 자매는 일을 시작하려 한다. 오직 장남이 오기만을 기다려온 큰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장남 없이 무덤을 파냐?” 가부장적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억압받으며 살아온 딸들은 반격에 나선다. “장남이 무슨 벼슬이에요? 우리도 아버지 자식이에요.”

영화 ‘이장’은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모인 오남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정승오 감독은 어릴 적 제사를 지내면서 고모와 누나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가족 안에 차별받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 의문을 가졌고, 그때의 질문을 이번 시나리오에 풀어냈다고 밝혔다.

정식 개봉에 앞서 ‘이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 제주여성영화제, 원주옥상영화제 등 국내 다양한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을 넘어 폴란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신인감독경쟁 대상 수상, 뉴욕아시안영화제, 파리한국영화제, 피렌체한국영화제 등에 초청됐으며, 북미 아시아 전문 매체 AMP가 선정한 ‘올해의 아시아 영화 TOP25’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이름을 올리며 기대감을 받기도 했다.

영화 '이장'에서 첫째 혜영은 티격태격하는 여동생과 잠적한 남동생을 이끌며 성인이 돼서도 장녀 노릇을 하기 바쁘다.
영화 '이장'에서 첫째 혜영(장리우 분)은 티격태격하는 여동생과 잠적한 남동생을 이끌며 성인이 돼서도 장녀 노릇을 하기 바쁜 인물이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한다’는 타이틀처럼, 작품은 남성 중심적 문화로 인해 가정과 사회에서 차별받아온 인물들의 스토리에 집중한다. 특히 백씨 집안에서 ‘딸’로 태어나 ‘아들’과 차별받아온 네 자매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가부장적 질서와 끊임없이 싸운다.

‘살림 밑천’이라 불리는 장녀 ‘혜영’은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지만, 이혼 후 육아휴직을 신청하자 퇴사 권고를 받으면서 혼란에 빠진다. 가정주부인 둘째 ‘금옥’은 알뜰살뜰 살림을 꾸리며 살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몰래 속앓이를 한다.

예비신부인 셋째 ‘금희’는 결혼 비용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서 나온 보상금을 결혼 자금으로 지원해주지 않는 점에 불만을 품는다. 10년째 대학생인 넷째 ‘혜연’은 학내 페미니스트 운동 등을 주도하는 열정파이지만, 현실적 벽에 부딪히며 좌절한다.

집안의 VIP로 불리는 막내아들 ‘승락’은 집에서 너무 귀하게 키워서인지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뭘 하고 사는지 도통 연락도 안 되고, 이장 문제로 그를 찾아 온 누나들 몰래 자취방에 아무도 없는 척 숨을 죽인다. 승락은 누나들과 비교해 극 내내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며 호감이 가지 않는 답답한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서 매장이냐 화장이냐로 갈등을 빚지만, 결국 자매들의 뜻대로 화장을 한다. 오남매는 묘 이장 과정에서 아버지,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한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서 매장이냐 화장이냐로 갈등을 빚지만, 결국 자매들의 뜻대로 화장을 한다. 오남매는 묘 이장 과정에서 아버지,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한다.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82년생 김지영’ ‘벌새’ ‘윤희에게’ 등 여성 서사에 주목한 작품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는데, ‘이장’ 역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적 이야기를 다각도로 담아냈다. 가정 안에서 남녀차별을 받으며 성장해온 에피소드나 사회에 나와서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 때문에 답답해본 경험이 있다면 남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이다.

가부장적 질서에 따른 여러 모순이 한국사회 만의 특징 같지만, 해외 관객들은 ‘이장’에 공감을 보내왔다. 정 감독은 “언어와 문화가 다르지만 영화에서 각 인물이 겪는 가족 안에 차별들과 사회에서 겪는 아픔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해주셨다”며 “아시아, 특히 여성 관객들이 공감해주시는 부분에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여파로 개봉 날짜 미룬 ‘이장’은 확산 추이를 지켜보며 새로운 개봉 날짜를 모색 중이다. 관객들이 점점 줄고 개봉이 줄줄이 연기되는 상황에서 영화계의 시름도 커지고 있다. 배우 장리우, 이선희, 공민정, 윤금선아, 곽민규, 강민준 등 출연.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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