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거직후의 안중근 의사./사진=장석흥 교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거행한 안중근 의거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의 사상인 ‘동양평화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것은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길이었지만,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안의사는 이토 처단 후 국제재판소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동양평화의 진실을 알리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인도(引導) 및 불법 재판에 의해 안의사의 계획은 차단되고 말았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의 조차(租借) 지역으로 사실상 러시아의 영토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안의사는 일본인이 아닌 대한제국의 국민이었다.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라면, 러시아에서 관할한 뒤 국제사법재판소로 넘겨 재판을 받는 것이 국제적 관례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한 채 러시아로부터 안의사의 신병을 넘겨받아, 일본 법률에 의한 불법 재판을 강행했던 것이다. 

안 의사는 의거 직후 러시아 시심재판소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그날 저녁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10월 28일 뤼순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넘겨져 10월 30일부터 심문을 받았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불법 재판에 의해 안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미 생사를 초월한 안의사는 사형 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옥중에서 두 종류의 저술을 구상했다. 하나는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 역사>, 다른 하나는 동양평화를 위한 사상 및 방도를 담은〈동양평화론〉이었다. 〈동양평화론〉집필을 시작한 것은 〈안응칠 역사〉를 끝낸 1910년 3월 15일 직후였다. 이때 안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을 한 달 정도 연기해줄 것을 요구해, 일제 고등법원장으로부터 “몇 달이 걸려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한지 열흘 뒤 1910년 3월 26일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만약 항소했다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동양평화론〉을 마칠 수 있었을 테지만, 일제 법원장의 약속을 믿다가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한 기간은 10여일에 불과했다.  

동양평화론 표지./사진=장석흥 교수

〈동양평화론〉의 체계는 1)서(序) 2)전감(前鑑) 3)현상(現狀) 4)복선(伏線) 5)문답(問答) 등으로 구성됐다. 그 중 안의사가 집필한 부분은 1)서(序)와 2)전감(前鑑)의 일부였다. 대략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심문과정에서 안의사의 진술들을 덧붙이면 〈동양평화론〉의 대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안의사는 심문과정에서 일본 검찰관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일본 검찰이 내세운 논리는 이런 내용들이었다. 1)독립할 능력이 없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되면 일본에 매우 불리해지므로, 청일?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청일?러일전쟁은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불기피한 선택이었다. 2)국제공법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보호’하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가 인정한 바이다. 3)일본은 한국의 진보(발전)를 위해 한국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4)‘한일협약’은 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한 일본의 조치이며, 이는 합법적이다. 5)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가능케 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무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6)이토를 죽인 것은 살인행위를 금하고 있는 천주교 교리를 위반한 것 등이었다. 

안의사는 이렇게 반박했다. 1)러일전쟁과 함께 일제가 강제한 을사늑약, 한국 황제 폐위 등 일제의 침략정책에 한국인들은 분개하고 있다. 2)한국 ‘병합’에 대한 일본의 야심을 열강들이 좌시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탄을 획책하는 주동자이다. 3)일본이 위생?교통시설의 완비, 학교의 설립 등을 내세워 한국의 진보를 돕고 있다고 하나, 이는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이 아니다. 명치(明治) 초년의 일본은 문명하지도 진보하지도 않았다. 4)을사늑약은 일본 군대가 황제를 협박해 강제로 체결한 것이다. 을사늑약은 “형제 동지 간에 있어 한편이 다른 한편을 먹이로 삼은 것”이다. 5)‘이토 히로부미 죄상’은 15개조에 달한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이토를 죽여 일본을 각성시키고 침략행위를 중지시키고자 한 것이다. 6)“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 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더 큰 죄”이며, 이는 결코 천주교 교리에 위반한 것이 아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야말로 인도주의에 반한 행위이다.

포박당한 안중근 의사./사진=장석흥 교수

일본의 억지 주장과 궤변에 맞서 안의사는 조목조목 예를 들며 반박했다. 특히 이토를 오해했다는 내용은 안의사를 ‘정치범’이 아닌 일반 ‘살인범’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꾸며낸 궤변이었다. 당시 국제법상 정치범에게는 사형 집행을 금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일본은 안의사를 ‘흉한’으로 몰아 사형을 내리고자 한 것이다. 안의사는 이토의 죄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과연 이토는 만주를 왜 왔던 것인가. 당시 만주정세는, 만주진출을 시도하는 미국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러·일 양국의 공조체제가 절실하던 때였다. 러·일 양국의 과제는 만주의 분할 점령이었다.  

섬나라 일본에게는 만주침략이야말로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절대적 숙원의 과제였다. 일본은, 1904년 테프트?카스라 밀약으로 동남아시아 침략이 차단된 가운데, 한국에 이어 만주 침략이 유일한 활로일 수밖에 없었다. 이토는 만주를 분할 점령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하얼빈을 찾았던 것이다.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옥중에서 구상된 것이 아니었다. 안의사는 소년시절 이래 천주교 신부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정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쌓았고, 청년시절에는 진남포에서 삼흥학교·돈오학교 등 중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운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이 무렵 안의사는 ‘대학’ 설립에 대한 의지를 펴기까지 했다. 1907년 해외 망명한 뒤에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동양평화론’의 골간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국과 청국, 일본 등 삼국이 일치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양평화의 범주에는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태국, 미얀마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자주 독립을 유지할 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동양평화론’의 핵심이었다. 

그렇다고 ‘동양평화론’이 인종주의에 의해 무조건 서양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이 침략해오니까 그것을 막자는 것이지, 서양이 침략을 버린다면 언제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동양평화론’의 행간에 담겨져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현실이었지만, 침략 행위를 중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다면 한국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동양평화론’은 침략과 전쟁을 억제하는 것에서 평화의 출발점을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일본 국민을 구원하기 위해 이토를 처단했다”는 안의사의 외침은 그런 동양평화의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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