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석 이석영 선생

1911년 서간도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사관을 길러내는 독립군양성소였다.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0여년 동안 3500여명의 독립군 사관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근간을 이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흥무관학교에 참가했던 수많은 인사들의 활약상도 익히 접하는 터이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건립의 지대한 공로자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은 낯설기만 하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1만석의 재산을 쾌척한 일화는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석영은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둘째 형이다. 이석영의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일가권속 60여 명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려는 포부를 갖고 단행한 망명이었다.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독립군기지 개척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그 재정을 담당한 이가 이석영이었다. 이석영의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으면, 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할 수 없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석영은 1855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중기 청백리로 이름을 높인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후예이다. 이들 가문은 300여 년 동안 8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하며, 생부 이유승(1835~?)이 이조판서, 양부 이유원(1814~1888)이 영의정을 지낸 삼한갑족의 명문가였다.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이유원은 서울까지 80리 동안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전장을 지니기도 했다. 덕분에 이석영은 1만 석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이회영 형제 회의 기록화./사진출처=우당기념관

이석영은 1885년 과거 급제해 벼슬길로 나서 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기도 했으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을 떠나 재야에 머물렀다. 그 뒤 몇 차례나 광무황제(고종)의 부름이 있었지만 정치에 몸을 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대저 이회영의 소신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평소 이회영은 ‘벼슬길에 나가 목숨을 바쳐 시국을 바로 잡고 이도(吏道)를 세울 수 있다면 몰라도’,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 벼슬길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녔다. 당시 조선의 정치계는,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옛것만을 고집하는 ‘수구파’와 서양의 문물이 무조건 옳다는 ‘개화파’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정치판에 뛰어들기 보다는 민족의 앞날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 우당의 철학이었다.

이석영의 독립운동은 동생인 우당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당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던 그였다. 우당은 젊은 시절부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던 혁명가였다. 우당의 주위에는 이상설·이동녕·여준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함께 했다. 이들에게 이석영의 집, 남산 홍엽정은 집합처였다. 이들은 홍엽정에 모여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웅지를 펴나갔다. 그리고 이석영은 그들에게 넉넉한 품을 제공했다. 

우당의 형제와 동지들이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에 나선 것은 을사늑약 직후였다. 이회영과 이상설이 첫 후보지로 꼽은 곳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용정이었다. 용정은 일찍부터 한인사회가 발달했으며, 러시아 연해주와 가깝고 국내와 왕래가 편한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그로 향하던 이상설이 1년여 시간을 용정에 머물며 세운 것이 서전서숙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라 불리는 서전서숙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군기지 개척이었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이상설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용정을 떠나고, 한국통감부 간도파출소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1908년 가을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군기지 개척의 방도를 다시 논의했다. 이를 통해 독립군기지 개척의 구도와 틀을 잡을 수 있었다.  

급기야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최후를 맞이하자, 더 이상 독립군기지 개척을 미룰 수가 없었다. 이석영의 재가를 받은 우당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 답사에 나섰다. 남만주 일대를 시찰하고 독립군기지 터를 물색한 우당은 1910년 9월 이석영을 비롯한 6형제들과 모여 망명을 결의했다. 이들 6형제는 일가권속을 6, 7대로 분산해서 남대문, 용산, 장단 등에서 따로따로 기차를 타고 떠났다. 이들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1911년 2월 목적지인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했다. 이석영 일가의 서간도 망명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영농(백서농장) 광경

1911년 4월에 열린 대고산 노천대회에서는 민단적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와 군사양성소인 신흥학교의 건립 등을 결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신흥학교 설립에도 온갖 고초가 따랐다. 이들을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한 현지 중국인들의 경계가 심해 학교 부지를 구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는 입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신흥학교는 1911년 6월 추가가 마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이때 신흥학교의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였다. 신흥이란 나라를 새롭게 일으킨다는 뜻을 지녔고, 강습소라 명명한 것은 중국 당국의 감시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신흥학교의 첫 학생은 40여명 정도였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았으며, 이석영을 비롯한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집에 머물며 심신을 단련해 갔다. 

신흥학교는 1912년 합니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한 뒤 공사를 시작해 강당과 교무실을 비롯해 내무반·사무실·숙직실·식당 등 무관학교로서 격식을 갖춘 교사를 지을 수 있었다. 산허리를 따라 지은 18개 교실의 건물은 병영사나 다름없었다.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남 앞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성품이지만, 신흥학교가 세워지기까지 공이 워낙 지대했으므로 주변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1운동 직후 그는 서간도를 떠나 이회영이 있는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인지라 국내로 돌아올 법도 했지만, 그는 국내행을 마다했다. 1930년 이회영이 상하이로 떠날 때 그도 함께 상하이로 내려갔다. 상하이에서 그는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는 기구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1932년 동생 이회영을 먼저 보내고, 자신도 1934년 2월 16일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만이 아니라 집안의 희생까지 각오하고 나서야 했던 가시밭길이 독립운동이었다. 온갖 부와 영예를 떨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석영의 삶과 자취는 한국인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뚜렷이 보여준 역사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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