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 개회식

민족의 자유와 인류 평화를 외친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표상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을 놓고, 평화의 가치보다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시선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평화는 자유와 평등이 선행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와 평등은 평화의 근본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   

과거 제국주의 열강이 전쟁과 침략을 앞세우며 주장했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침략을 속이거나 합리화하는 거짓 평화였다. 20세기 초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과 만주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논리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도 그런 명분에서였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제국주의는 분명 반인류적이었다. 그들의 정의는 곧 힘이었다. 그들은 힘을 앞세워 인간의 자유를 유린하며 세상을 어지럽혔다. 그것을 거부하며 제국주의 퇴치에 나선 것이 한국 독립운동이었다. 그 바탕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자리했으며, 나아가 민족의 자유를 넘어 세계 평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한국인의 의지는 19세기 말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근대 변혁운동에서 두드러졌다. 이런 신념과 의식은 나라가 망한 뒤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을 통해 전승됐다. 그리고 3·1운동 때 이르러 국제사회를 향해 진정한 세계 평화를 외칠 수 있었다. 제국주의가 판치던 세상이었지만, 3·1운동은 약소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지향하는 평화사상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전후문제 해결을 위해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 /사진=연합뉴스

3·1운동의 평화사상은 국내외 각처에서 공표한 수많은〈독립선언서〉에서 뚜렷이 제시됐다. 선언서들은 한국 독립은 물론 인도주의에 의거한 세계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정의·인도·자유·평등·평화를 표방한 이들 선언서는 3?1운동의 근본정신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회진화론적 인식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를 중심 개념으로 내세운 3·1운동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약자도 정의를 내세울 수 있는 평화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용운이 3·1운동 직후 감옥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조선 독립의 서〉는 평화사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인류가 추구할 최고의 가치로서 ‘자유와 평화’를 설정하고, 자유와 평화는 인류의 권리이자 의무라 정의했다. 또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근거하며, 평등은 자유의 짝이라면서, 자유는 평화를 지키고, 평화는 자유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인간에 대한 평등주의, 사회에 대한 평등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이를 짓밟았으니, 독일과 일본이 그것이라고 했다. 또한 무력으로 정의와 인도를 저버리는 것은 평화가 아니며, 평화를 위한 전쟁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용운은 열강들이 내세웠던 ‘전쟁과 평화’와는 다른  순연한 평화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이 아닌 평등을 전제한 정의, 인도, 인민에 의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한용운의 사상이었다. 이처럼〈조선 독립의 서〉는 민족 독립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자유와 평화로 열려 있었다. 

한용운 조선 독립의서

 

3·1운동의 국제적 연장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한 것도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평화운동의 실천이었다. 3·1운동은 만세시위에 그친 운동이 아니었다. 먼저 그 결실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가 하면 한국인의 자유와 평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도 강구됐다. 파리강화회의는 3·1운동의 국제적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무대였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대표단은 3·1운동에 기초한 한국의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파리강화회의는 당시 전쟁 당사국뿐 아니라 약소민족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무대였다. 특히 약소민족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식민지 민족자결 문제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은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한다는 것이 전제였다. 때문에 승전국 식민지에 대한 민족자결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의 의제로 상정될 수 없었다. 그것이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합의였다. 

한용운 조선 독립의서

그렇지만 독립을 열망하던 세계의 약소민족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그들의 독립 문제가 상정되길 바라면서 각종의 청원서를 올렸다. 또 그들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며 국제외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약소민족들은 한국을 포함해 30여 민족에 달했다. 그 가운데는 승전국의 식민지인 아일랜드, 이집트, 한국, 베트남 등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했다. 대표 김규식을 비롯해 이관용, 황기환, 조소앙, 김탕, 여운홍 등이 활약한 한국대표단은 1919년 5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에게 제출하고, 이사회 위원들과 윌슨을 비롯한 각국 원수들에게도 발송했다.

그러나 약소민족의 청원은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라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파리강화회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들 약소민족은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청원 활동을 펴나갔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약소민족의 진정한 민족자결을 위한 국제사회 정의의 실현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 식민지들의 민족자결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것은 민족자결의 정의가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확산과 팽창이라는 새로운 세계 구도를 결정짓는 민족자결의 배반이었다. 그것이 파리강화회의의 한계이자 과오였다. 파리강화회의 전후 처리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남겼을 뿐 아니라 1990년대 복잡하고 지루하게 얽혀진 동유럽 민족분쟁의 원인을 제공하는 역사의 잘못이었다.  

3·1운동의 정의와 진실은 서영해가 1929년 파리에서 불어로 간행한 한국역사소설《Autour d'une vie coréenne(어느 한국인의 삶)》을 통해 프랑스어권을 비롯해 스페인 등지에서 되살아났다. 이 책은 한국의 역사 문화와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쓴 것이었다. 42세기 동안 역사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한국이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의 끝부분에는〈독립선언서〉전문을 불어로 번역해 대미를 장식했다.〈독립선언서〉는 이 책의 결론이자, 평화 정신의 상징이었다. 또 3·1운동의 정신인 자유·정의·평화에 의거해 한국이 1919년 독립을 선언한 나라임을 알렸다. 이 책은 프랑스를 넘어 스페인과 유럽 무대, 이집트 등지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3·1운동의 진실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에 다가설 수 있었다. 

3?1운동은〈독립선언서〉에서 밝히듯이 반인류적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는 평화운동이었다. 때문에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도 크게 기여한 인도주의운동이었다. 당시 인류가 제국주의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을 때 3?1운동은 피압박민족해방운동의 선구로서, 약소민족의 독립과 평화의 길을 열어간 역사의 등불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이제는 평화운동의 가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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