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한 윤봉길 의사의 선서.

1932년 3월 초 윤봉길은 상하이 홍구시장에서 야채 행상으로 나섰다. 홍구공원 정문 옆에 위치한 이곳은 일본인 거리의 중심지였다. 바로 건너에는 일본군 사령부도 있었다. 그가 살던 프랑스 조계와는 전차로 30여 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다. 윤봉길은 전차 차장을 하는 계춘건과 함께 매일 오후 그 곳에 나타나 야채를 팔거나, 때론 밀가루도 팔았다. 행상은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러면서 홍구공원 정문을 지나 후문 밖 일본인 거주구역까지 왕래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물론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였다. 일본인을 가장할 만큼 일본어도 능숙했다. 상하이에 오기 전 칭다오의 일본인 세탁소에서 1년 넘게 일해 일본문화에도 익숙한 터였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윤봉길은 2월 중순 백범의 지시에 의해 부두노동자로 위장해 홍구 부둣가 근처 일본군 무기고를 폭파하는 작전에 투입된 바 있었다. 이때는 상하이를 침공한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군대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중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퇴각하고, 3월 1일 일본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했다. 이와 함께 무기고 폭파 작전도 중지되고 말았다. 윤봉길은 폭탄이 조금 더 일찍 만들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에 분통을 터뜨렸다. 작전이 중지된 후에도 그는 비밀리에 침투해 무기고를 폭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야채 행상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도 일본인 거리의 중심에 있는 홍구시장에서, 오후 무렵 야채 행상에 나선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1932년 4월 29일.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이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군의 승전축하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홍구공원에는 1만 명의 일본군이 전차 및 대포를 앞세워 열병식을 거행하고, 수십 개의 대형 욱일기가 행사장 주위에 펄럭이며 침략자의 위용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그 경계도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비웃기라도 하듯 혈혈단신으로 의거를 통쾌하게 성공시켰다.

중국의 장개석은 “중국 국민당 군대 10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윤봉길이 혼자 해냈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이 회생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윤봉길 의거가 갖는 가치와 의미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얘기돼 왔다.  

청도에서 윤봉길 의사의 모습.

그러나 정작 윤봉길이 의거를 어떻게 준비해 갔던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 의거와 관련해 가장 정확해야 할《백범일지》의 기록도 소략하거나 빠진 내용이 적지 않다. 윤봉길이 일본군 무기고 폭파작전에 참가한 사실, 1931년 7월 이후 백범과 매월 두세 차례 정기적으로 만나 대사를 의논했던 사실 등이 누락돼 있다. 홍구시장에서 야채행상을 한 것을 두고 생활 연명의 수단인 양 서술한 내용도 진실을 혼란스럽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윤봉길을 한시(漢詩) 깨나 짓는 젊은이 정도로 서술한 것도 그렇다. 백범이 왜 그렇게 서술했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윤봉길 의거가 별다른 준비 없이 거행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대장부출가생불환(大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출사표를 남긴 윤봉길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31년 6월 23일이었다. 그가 의거에 이르기까지 상하이에 머무른 기간은 10개월 정도였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을 찾아 갔다. 독립운동의 포부를 내보인 그는 백범의 주선으로 모자공장인 종품공사에서 일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상하리만치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어떠한 표면 활동도 벌이지 않았다. 독립운동에 뜻을 둔 청년이라면 수많은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쯤에는 참가했을 법 한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윤봉길은 일제 정보에 전연 노출되지 않았다. 그가 일본인 행세를 하며 홍구시장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윤봉길은 백범의 요청에 의해 1931년 7월 이래 사해다관이란 찻집에서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만남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이 무렵 백범은 이봉창과도 비밀스럽게 만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왕 처단’이라는 엄청난 의거를 추진해 갔다. 이로 미루어 윤봉길과도 모종의 대사를 도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 오랜 시간을 두고 은밀히 독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윤봉길 역시 이봉창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신분을 감춘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윤봉길은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에 일본인들이 매년 홍구공원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행상에 나설 즈음 천장절에 전승축하식이 함께 열릴 것까지는 몰랐어도, 천장절 기념식에 일본군 수뇌가 참석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넘게 행상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은 거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윤봉길은 의거 당일 입장권도 없이 홍구공원 정문을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백범일지》의 서술과 달리, 야채 행상을 하던 중에도 윤봉길과 백범의 만남은 계속됐다. 4월 10일에는 4월 24일 홍구공원에서 거행하는 소위 ‘칙유(勅諭) 50주년기념식’에 참석하기로 의견을 나눴다. 칙유란 1882년 일본왕이 장래 의회를 개설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것을 말하는데, 1932년은 소위 칙유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며칠 뒤 백범은 윤봉길의 숙소로 찾아와, 홍구공원에서 일제가 소위 천장절 겸 전승경축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두 사람은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라 여겼다. 

상해 노신공원 매헌기념관.

4월 20일 백범은 윤봉길에게 중국돈 200원을 건네주었다. 이 돈으로 코트와 구두를 사고, 기타 음식 값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이날 저녁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백범을 다시 만났다. 이때 백범은 윤봉길에게 의거 당일 사용할 물통 모양의 폭탄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각 1개씩을 보여 주었다. 4월 24일 윤봉길은 홍구공원에서 열리는 소위 ‘칙유50년 기념식’을 다녀왔다.  

4월 26일 오전 9시 윤봉길은 백범을 만나고, 안공근의 집에서 선언문을 작성했다. 4월 27일에는 안공근 집에서 양복을 입고 단신 사진 1장, 가슴에 선언문을 붙이고 폭탄과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사진 1장, 백범과 함께 찍은 사진 1장 등 모두 3장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날 윤봉길은 패륵로의 호텔 동방공우(東邦公寓) 30호로 숙소를 옮겼다. 심신의 안정을 취하게 하려는 백범의 배려에서였다. 저녁에 김구가 찾아와 폭탄은 투척할 때 끈을 당기면 소리가 난 후 4초 안에 폭발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29일 아침에 폭탄을 건네주기로 했다. 

4월 28일에는 백범과 점심을 함께 한 뒤 열병식 예행연습을 살필 겸 최종 현장 조사를 위해 홍구공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 시라가와(白川)와 우에다(植田)의 사진 및 일장기를 구입하고, 오후 2시부터 3시간가량 현장을 점검했다. 식장의 위치와  좌석 배치를 점검한 뒤 기념식대 뒤편에서 일반 관중에 끼어 결행하기로 하고, 그 지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의거 당일 목표한 과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중시켰다.  

윤봉길 의거는 이렇게 치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에 의해 거행한 특공작전이었다. 30만 명의 중국 국민당군이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최전선에서 혼자의 몸으로 벌인 독립전쟁이 바로 윤봉길 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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