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6일 열린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

백범 김구는 1947년 12월 그 유명한 「나의 소원」을 썼다. 이때 백범의 나이 72세였다. 이 글은 훗날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물론 앞부분 만이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이 소원을 물으면, ‘대한 독립’이고, 다시 물어도 ‘대한의 자주 독립’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백범의 ‘소원’하면, 대한의 자주 독립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글은 과거 독립운동을 회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미래에 대한 소원을 담은 것이었다. 그것도 미래를 열어나갈 청년들에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궈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다면 백범이 바란 높고 아름다운 문화는 어떤 것이었는가?

임시정부 환국 환영식장의 김구와 이승만

「나의 소원」을 발표할 무렵 우리나라의 정세는 해방이 되었다고 하나 나라도 세우지 못한 채 남북이 분단되고 이념적 파벌로 내분과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당시 좌우익 간에는 민족을 부정하는 극단의 논리가 판을 치며 세상을 어지럽혔다. 우익 중에는 차라리 미국의 연방에 편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괴변이 나돌기도 했다. 이에 백범은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하지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고 꾸짖었다. 좌익 가운데는 소련을 사상의 조국이라 운운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백범은 이를 두고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인 것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인 것”이라며, 민족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당시 극단적 좌우익의 생각과 주장은 식민지 시기 친일의 잔재이거나, 국제주의적 공산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백범은 좌우익이란 것 자체가 일시적 풍파에 불과한 것임을 준엄하게 경고했다.

38도선 표지판 앞에선 백범. 좌우에 김신과 선우진

백범이 말한 ‘자주 독립’은 어떤 종교나 특정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나라를 의미했다. 이를 위해 백범은 두 가지의 임무와 역할을 제시했다.

첫째가 남에게 의지하거나 간섭받지 않는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독립운동 시기 자주독립 없이는 민족의 생활과 정신을 보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무엇보다 자주 독립을 외친 것이다. 둘째로는 인류 평화를 위한 사상을 우리 민족이 만들어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화의 사상이란, 국제적으로 제국주의 폐해를 극복하고 침략과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백범의 평화 사상은 민족에 그치지 않고 세계주의로 향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세계 평화를 달성하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먼저 민주주의에 의한 민족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백범의 지론이었다. 즉 자기 민족을 위해 다른 민족을 해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각기 민족주의를 꽃피워 서로 교류하면서 세계주의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위한 바탕이자 진리였다.

김구

완전한 자주 독립과 높은 문화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백범의 신념이었다. ‘자유의 나라’는 오로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법이 결정되는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꼽았으며, 국민의 언론을 무시한 그 어떠한 전제와 독재도 반대했다. 그것은 정치 뿐 아니라 사상과 종교,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적용되었다.

백범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정치의 계급 독재를 꼽았다. 5백년간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의 지배는 정치적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고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 구속시켰다고 지적했다. 성리학 이외의 사상과 학문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성리학의 교리를 다르게 해석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민족의 문화가 소멸되고 원기가 마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획일적 사상과 학문이 세상을 지배하는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지 못한 것이 결국 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백범은 또한 소련의 공산주의를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설파했다. 이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의 독재 이상으로, 설령 세계가 공산주의 세상이 된다면 인류의 커다란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라 경계했다. 백범은 개인의 전제보다 무서운 것이 계급의 독재이며, 계급의 독재가 철학이나 종교, 학문으로 무장되는 것은 자유에 가장 큰 해악이 된다고 보았다. 어느 한 학설이나 사상으로 국민을 속박하는 것은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해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는 것이 백범의 생각이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제2기생 일동(1947.11.30.) /사진=백범김구전집

청년시절 이래 동학, 성리학, 불교, 기독교, 대종교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섭렵한 바 있던 백범은 종교나 사상에도 크게 열려 있었다. 그것은 서양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개방과 자유의 문화였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진정한 자유의 나라이며, 이런 나라에서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라 내다 봤다.

자유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백범이 강조한 것은 문화, 교육의 힘이었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전환기에 태어나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던 백범에게 교육은 새로운 문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인식됐다. 좋은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1945.11.3) /사진=백범김구전집

백범의 꿈은 세계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백범이 바란 우리나라는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나라였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부강한 나라보다는 높은 문화의 나라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백범은 문화의 힘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남에게도 행복을 준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면서 남을 모방하는 나라가 아니라, 전통과 외래의 문화를 잘 조화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비롯하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혹 이런 소원이 추상적이거나 ‘공상’ 같은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백범은 그런 불안과 우려를 단호히 배격했다. 세상에서 이루지 못했던 일이기에, 우리가 해내자는 것이 백범의 신념이었다. 그는 독립을 위한 길에서 어떤 좌절과 낙망도 없었다. 고난의 행군에서도 그는 독립의 꿈을 향해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평생의 독립운동 정신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제시한 것이 곧 문화국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몫은 젊은이들에게 맡겨야 하고, 새 세대가 그 일에 매진하면 30년 안에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경교장을 방문한 중국대사 유어만(1948) /사진=백범김구전집

돌이켜 보면, 백범이 꿈꾼 문화의 나라가 결코 공상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6·25전쟁과 기나긴 독재로 암울의 시대를 거쳐야 했지만, 민주화의 진전, 경제 성장을 통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한국의 저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문화국가를 향한 백범의 꿈은 오늘날 우리가 가슴 깊이 새기고, 이뤄내야 할 명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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