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시사저널에 ‘시민단체, 서울시에서 빌린 돈으로 30억원 빌딩 매입’이라는 제목으로 시민자산화를 추진하던 ‘해빗투게더협동조합’을 비판하는 기사가 보도됐다. ‘시민자산화’는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공간을 떠나야 했던 세입자 단체들이 모여 부동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지역 정착 및 안정화를 추진하는 정책이다.

기괴한 점은, 해당 사업이 불과 5개월 전에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에서 '시민 300명 3년 만에 33억 건물주 됐다'라며 주목받았다는 거다. 시장주의를 지지하는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는 방식보다는 시장에서 선순환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작 반 년이나 지났을까, ‘시민단체’의 ‘시민’ 글자만 들어가면 보수 정치와 이에 편승하는 언론은 기존의 사업을 때리기에 바쁘다. 진영논리, 왜곡, 호도 행위가 새삼스럽지 않은 시대가 됐다지만, 물타기 하듯 매도하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바야흐로 혼종 혹은 잡종 정치의 시대다. 시대착오적인 혼종 정치의 모습은 통합의 시도라든지 형식을 파괴하는 혁신과는 결을 달리한다. 오디션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남성 댄서가 출연하는 것과 같은 기괴한 미장센을 상상해보라. 래퍼 스윙스가 아무리 화제성 인물이더라도 ‘미스터트롯’에서 활약하기란 정말 어려울 테고, 가수 임영웅이 팬덤층이 두텁다고 할지라도 ‘쇼미더머니’에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퓨전요리가 신선한 매력을 뿜을 때도 있겠지만, 기준이나 철학 없는 혼합은 그저 잡종 밥과 다를 바 없다.

2021년 한국 정치는 단순히 양당제 기득권의 문제를 넘어섰다. 양당제가 공고화되었다는 미국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자의 기조와 철학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양당(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국가주의, 시장주의, 공안정국, 큰정부, 작은정부, 복지와 포퓰리즘, 젠더 정책 등등 시민 관점에서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게 제멋대로다. 정책의 철학이 없으니 대선 후보들은 결국 비호감도로 경쟁하고 있고, 유권자만 불쌍한 선거가 되고 말았다.

혼종의 정치는 대선도 대선이지만 서울시에서도 피차일반으로 등장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내일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은) ‘20억 아파트 단지’에 가서 기어코 민간 재개발 바람을 불어넣는다. 페이스북 등의 매체를 통해 부동산 정책은 공공의 영역이 아니라는 화두를 계속 던지면서, 투기 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공공 재개발’이란 수단은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난 11월에는 ‘시민의 공공주거복지를 책임지는 SH’라는 슬로건으로 서울주택도시공사의 5대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해당 발표에는 공기업이 주택공급부터 주거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거복지센터까지 다하겠다는 발상이 담겼다. 시민의 공익을 위해서 공공이 나서야 할 때는 방치하다가, 민간 거버넌스가 성과를 우수하게 쌓고 있는 주거복지센터나 청년 상담 영역을 갑자기 공기업이 도맡겠다니,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자아 분열 수준이 이 정도였을까 싶다.

진보적 색채의 정책이 세상 모든 문제를 정부의 틀에서 계급과 가난의 극복으로만 고정했던 시기를 지나 민간의 거버넌스를 통해 공공성의 주체를 다변화한 것은, 한편으로는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값진 선택이었다. 반대로 보수적 색채의 정책 기조에서 SH와 같은 공기업의 역할을 강조하고 시장경제에만 의존하지 않는 변화는 충분히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하지만 지금의 시도는 혁신보다는 시민 없고 철학 없는 취사선택에 있기에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부디 진영논리에 갇히지 말자. 정권을 누가 잡든지 비영리·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영리 질서가 필요한 영역은 돈을 좇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자본의 흐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공기업이 책임지면 된다. 우리 사회는 돈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호명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지를 오랜 시간 목도해왔다. 특히 집 문제가 너무 첨예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오는 도시 서울에서 격차와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으므로, 최대한 많은 주체가 힘을 모아 공익을 위해 힘쓰기도 부족하다.

원주민이 쫓겨나지 않고 청년들이 집값 절벽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공공 재개발을 강조하자. 사회주택을 통해 비영리 민간 영역의 자금을 주거복지로 끌어오고 임대주택의 색을 다채롭게 만들자. 주거복지센터는 높은 성과를 보이는 주체가 구실을 하도록 장려하자. 주거 관련 정보와 교육 부족으로 민간임대시장에서 큰 피해를 겪고 있는 청년들을 위해 ‘서울시 청년주거상담센터’를 폐지하지 말자. 위에 열거된 사례들은 오 시장의 철학에서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잡종보다는 적절한 배합을 통해 더 매력적으로 탈바꿈하는 퓨전 정치가 2021년에 어울리는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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