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10월은 매우 분주한 달이었다. 국토교통부에서 ‘2021년도 테마형 매입임대 시범사업 사업자’(이하 테마형 임대주택) 공모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테마형 임대주택이란 다양한 사회적경제 주체 등이 돌봄·육아·교육, 일자리·창업지원, 귀농·귀촌, 장애인·자립 지원 등 테마가 있는 매입임대주택을 기획·설계·시공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들여 이후 테마에 맞는 주거 서비스 프로그램 제공부터 운영·관리까지 직접 수행하는 사업이다. 이러한 내용의 정책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사회주택 영역이었기 때문에, 다들 반가운 마음으로 공모사업을 준비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가 몸담고 있는 (사)한국사회주택협회에도 많은 역할이 요구됐다. 시범사업인 만큼 정책을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아 공공과 협의하는 한편, 공공과의 거버넌스 사업에 익숙하지 않은 주체들이 조금 더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컨설팅과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할에 주력하기도 했다.

업무가 밀물처럼 몰려와 체력이 남아나질 않고 고생길이 뻔했던 10월이었지만, 나에게 찾아온 것은 ‘번-아웃(Burn-Out)’보다는 새로운 에너지의 충전이었다. 넘쳐나는 새로운 상상과 기획이 공공주택 주거복지의 ‘넥스트 레벨’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선호하지 않는 지역에 물량만 채운 듯 보이는 공급 계획, 쓰레기가 쌓이고 건물이 노후화돼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임대주택, 지역사회에서 밀려난 입주자들, 공공임대주택의 정책 개선이 시급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양 중심의 사회와 관료적 시스템의 공기업 문화 속에서 공공임대주택 정책이 세심하고 매력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정치인이 원하는 숫자만 맞춰주고 준공 이후에는 더 관심을 두지 않으니, 공공임대주택의 기능은 오로지 공급에 그쳐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테마형 임대주택은 준비 과정부터 달랐다. 장애인 지원주택을 운영하고 있던 사회복지기관에서 탈시설 담론의 확장을 위해 소셜믹스와 지원주택 테마를 결합해 사업을 준비했다. 지역 소멸과 청년 인구 유출을 고민하는 비수도권 중소도시의 청년들이 모여서, 살자리, 일자리, 놀자리를 함께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획일화된 교육을 지양하며 아이들이 숨 쉴 수 있는 대안학교를 찾았던 학부모들이 지역사회 정착까지 시도할 수 있는 주택 모델을 꿈꾸고 있다. 수입은 변변치 않은데 대학가에 높은 임대료를 수년간 감당해야 하는 연구자들을 위한 주택을 상상하는 팀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주택이었지만 지금까지 시도조차 이뤄지지 못했던 사업들이 공공이 비영리·사회적경제 주체와 발을 맞춰 어느덧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5월 테마형 청년주택 '아츠스테이'를 찾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청년과 예술창업을 결합한 모델이다. 국토부가 테마형 매입임대주택 시범사업을 실시하며 사례로 내건 모델이다./사진=국토교통부
지난 5월 테마형 청년주택 '아츠스테이'를 찾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청년과 예술창업을 결합한 모델이다. 국토부가 테마형 매입임대주택 시범사업을 실시하며 사례로 내건 모델이다./사진=국토교통부

테마형 임대주택의 장점은 관료적인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개선에 머물지 않는다. 임대주택에 다채로운 색을 칠하는 것은 기본값이고, 더 나아가 여러 분야에서 우리 사회에 사회적 가치를 더하고 있던 현장 전문가들을 주거복지 및 공공주택 정책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집은 꼭 필요한 재화다. 주택(부동산) 영역에는 너무나 특수하면서도 진입하기 어려운 벽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깊게 하지 못했을 뿐, 분야를 막론하고 주택 정책은 모두의 관심사다. 10월 한 달 동안 장애인, 자활, 지역 소멸, 교육, 연구, 청년, 창업, 예술가 등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당사자인 사람들이 칸막이를 걷어내고 주거복지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불어 공공이 시혜적으로 집을 던져주는 수동적인 방식이 아니라, 주택 정책 속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직접적인 행위자로 고민하고 있었다.

테마형 임대주택의 사업 신청이 예상치를 훨씬 웃돌게 접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은 시범사업이고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취지에 맞게 정책이 구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회적경제 및 비영리 주체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는 역량을 잘 쌓아왔기 때문에, 주택 및 주거복지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역할을 해낼 것이라 기대한다.

남은 연말은 국토교통부와 LH의 시간이다. 다음 단계의 주거복지를 위해, 기존의 관성을 극복하고 생소함과 번거로움을 이겨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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