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역사의 물줄기가 작은 변수로 인해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7년 5월 28일 오후 7시,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붉은 광장 근처를 경비행기 한 대가 아주 낮게 선회하고 있었다. 광장에 있던 모스크바 시민들이 "무슨 이벤트인가", "저러다가 광장에 착륙하려나" 의아해하던 사이에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세스나127 기종의 경비행기가 근처 모스크바 다리에 안착하더니 서서히 광장에 진입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 모습을 드러낸 조종사는 안경을 낀 앳된 소년이었다.

광장 안쪽은 소련의 심장인 크렘린이고 악명 높은 KGB 본부도 거기에 있었다. 요원들이 곧 들이닥쳤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에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호기심에 찬 군중이 비행기를 둘러싸고 소년에게 질문 공세를 펴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몇 대의 트럭에 분승한 군인들이 도착해 비행기 주위에 원형으로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군중을 해산하지는 않았다. 두 시간 정도 흐른 후 검은색 세단이 광장에 들어와 마침내 소년을 체포해갔다. 

핵전쟁을 막으려는 평화주의자 독일 소년의 이상적 발상

출처=Getty Images Bank

이 소년은 서독 출신의 마티아스 루스트(Mathias Rust)로 당시 나이 겨우 18세였다. 살고 있던 독일 함부르크에서 세계 최고의 방공망을 자랑하는 모스크바까지 경비행기로 단독 비행을 한 것이다. 도대체 마티아스는 왜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일까? 

1980년대 초반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아진 시기였다. 1983년에는 소련 전투기가 영공 침범을 이유로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군은 서유럽에 퍼싱 중거리 핵미사일을 전진 배치하고 나토 또한 핵전쟁 대비 군사 훈련을 했다. 소련군 수뇌부도 맞대응 조처를 하는 등 동서 양 진영 사이에 핵전쟁 위험이 최고조에 달했다.

1985년에 새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고르바초프는 이전 서기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혁가, 온건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핵전쟁 위기가 계속되는 것은 모두에게 큰 부담이었으므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정상 회담을 했다. 상대를 코앞에서 겨냥하고 있는 중거리 핵미사일 수를 줄이는 군축회담이었는데 큰 결실없이 끝나 버렸다. 

나 혼자라도 유럽의 하늘에 평화의 다리를 만들겠다

실질적인 핵전쟁 위협에 시달리던 유럽인들은 크게 실망했는데 이 당돌한 독일 소년은 꺼져가는 평화의 불씨를 자기라도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냉전으로 인해 분단을 겪고 있던 서독 청년들 사이에는 반전, 평화운동의 분위기가 강했다. 마티아스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다른 청년들과 달랐던 점은 과감한 실행력을 갖추고 경비행기 운전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몰고 독일에서 모스크바까지 날아가서 서로 적대시하는 동서 양 진영을 잇는 ‘평화의 다리’를 하늘에 만들어 평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제작된 지 30년이나 되는 중고 세스나기 1대를 북유럽 일대를 연습 비행한다는 명목으로 3주간 임대한다. 

함부르크를 떠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와 노르웨이 베르겐을 거쳐 도착한 곳은 핀란드 헬싱키였다. 사흘간 머무르며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마티아스가 10대 소년이라고 해도 아무런 허가 없이 소련 영공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를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뭔지 모를 열정에 휩싸인 소년은 애초 계획대로 하기로 결심한다. 헬싱키에서 출발하면서 관제탑에 최종 행선지를 스웨덴 스톡홀름이라고 통보했다. 스톡홀름으로 가려면 항로를 남서쪽으로 잡아야 하는데 비행기는 이상하게 남동쪽을 향했다. 항공교통 관제소가 반대쪽으로 가고 있으니 빨리 방향을 바꾸라고 했지만 마티아스는 송수신기를 끄고 기수를 모스크바로 돌렸다. 그때가 당일 오후 1시였다.

우연과 우연, 행운과 행운이 겹쳐서 붉은 광장에 안전하게 착륙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도대체 마티아스는 2000대 이상의 요격기와 8000개 이상의 방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 방공군의 무시무시한 감시망을 어떻게 뚫고 6시간 동안 비행해서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을까? 정말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친 사건이었다.

사실 마티아스의 비행기가 영공에 접근하면서부터 소련 방공군은 레이더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항공지도가 없었던 마티아스는 시계 비행을 위해 1천 피트(약 300미터) 상공에서 낮게 비행했다. 너무 느리고 낮게 날아오니 소련 방공군은 바로 요격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고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요격을 위해 미그 23기가 출동했는데 소련 공군이 훈련기로 사용하는 야크21기와 외관이 너무 비슷해서 그냥 철수한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그냥 간 것은 아니었다. 미그23기 조종사가 피아식별을 위해 계속 교신을 시도했는데 군용 주파수로 한 것이 문제였다. 또 다른 우연은 마티아스가 자기도 모르게 소련 공군 훈련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모든 훈련기는 정해진 시간에 송신을 해야 했고 안 그러면 적기로 간주해 격추 절차를 밟는다. 관제센터의 지휘관이 관대한 사람이었는지 마티아스를 어리버리한 훈련생으로 간주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말 결정적인 우연은 붉은 광장까지 이어지는 8차선 도로의 모스크바 다리에서 생겼다. 착륙 지점을 찾아 광장 상공을 선회하던 마티아스의 눈에 넓은 다리가 들어왔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 바로 착륙하면 인명사고를 낼 것 같아서 다리에 내린 후 육로로 광장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원래 모스크바 다리 위로 트롤리버스가 지나다녀서 고압 전선이 설치되어 있는데 하필 그날 보수 공사를 하느라 전기를 다 차단해 놓았다. 평소 같으면 착륙 시도를 하다가 고압선에 닿아서 바로 감전사할 수도 있었다.

우연히 카메라에 잡혀서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영국인 의사가 촬영한 착륙 장면. 서방 언론이 이 영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세계 여론이 움직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영국인 의사가 촬영한 착륙 장면. 서방 언론이 이 영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세계 여론이 움직였다.

마티아스를 체포한 KGB는 즉시 집중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KGB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토나 미국이 배후에 있으리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이 하필 국경경비대의 날이었는데 소련군을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그날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취조까지 했다. 장시간에 걸친 조사 끝에 마티아스가 정말로 순수한(?) 의도로 벌인 짓이라는 것을 파악한 소련 당국은 처리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마티아스는 스파이 혐의 대신 불법 국경침입, 항공법 위반, (무단 착륙으로 인명사고를 야기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난폭행위로 4년 형을 언도받고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다. 

놀랍게도 마티아스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장면이 영상에 담겼다. 당시 붉은광장에 있던 영국인 심장병 의사 도빈 스토트가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했다. 그때만 해도 서방 국민의 모스크바 여행이 극히 제한됐는데 스토트 박사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심장병 주치의와 가까운 사이라 초대받아서 붉은 광장을 관광 중이었다. 영상을 찍은 것이 KGB에게 발각되면 테이프를 바로 압수당하기 때문에 잘 숨겼다가 귀국해서 서방 언론에 영상을 공개했다. 덕분에 전 세계가 마티아스의 안위를 주목하게 되었고 소련 당국도 그런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소련 양국의 데탕트 무드를 고려해서 소련 당국은 우호적 제스처로 마티아스를 14개월 만에 석방하기에 이른다.

개혁개방 정책 반대파를 제거하는 구실로 삼은 고르바초프

독일의 평화주의자 소년이 벌인 일은 단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집단 지도체제인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신입으로 들어와서 입지가 부족했다. 특히 소련 군부는 그의 개혁개방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고르바초프는 마티아스의 비행기가 소련 방공망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과 방공군 사령관을 즉시 해임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군 고위장교를 대대적으로 물갈이한다. 스탈린이 1930년대에 했던 군부 숙정작업 이후 최대 규모였다.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에 저항하는 반대파를 한꺼번에 제거하고 공산당 지도부에서 입지를 확고히 한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강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소련 체제를 붕괴시키고 냉전을 종식한 계기를 만든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자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18세 독일 소년이 벌인 행동은 인류 역사의 한 챕터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태풍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