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를 주도하는 독일의 총선(지난 9월 26일)은 여러모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총선 결과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차기 독일 정부의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EU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기 때문이다. 독일 정치의 기본은 다당제와 비례대표제, 그리고 의원내각제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총선 결과에 따라 제1당이 자당 중심의 내각을 구성한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제1당이 다른 당을 하나 선택해서 공동 내각을 구성하고 연립정부가 만들어진다. 

사민당이 제1당이 된 지난 독일 총선

독일 연방공화국 국회의사당./출처=Getty Images Bank
독일 연방공화국 국회의사당./출처=Getty Images Bank

지난 독일 총선은 '무티(Mutti·엄마)’ 메르켈 총리가 속한 중도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연합(CDU, 기민당)/기독교사회연합(CSU, 기사당)이 중도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 사민당)에 패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메르켈 총리가 4번 연임하는 동안 계속 제1당이었던 기민/기사연합이 사민당에게 1등의 자리를 내줬다. 제3당은 녹색당, 제4당은 자유민주당 (FDP, 자민당)이 되었다. 득표율에 따른 독일 총선 결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제1당 사민당(25.7%), 제2당 기민/기사당연합(24.1%), 제3당 녹색당(14.8%), 제4당 자민당(11.5%)

문제는 득표율에서 보듯이 1등과 2등의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정 파트너는 제1당이 주도적으로 고르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1등이 2등을 압도하는 상황이 아니니 차기 정부의 내각 구성을 주도하겠다며 둘이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연정 ‘경우의 수’가 3가지 나온다. 1) 제1당 + 제2당 연정(대연정), 2) 제1당 + 제3당 + 제4당 연정(신호등 연정), 3)  제2당 + 제3당 + 제4당 연정(자메이카 연정).

*신호등 연정: 제1당 사민당 상징 빨간색, 제4당 자민당 상징 노란색, 제3당 녹색당 상징 녹색이 합쳐지면 신호등 색깔이라고 붙은 별칭
*자메이카 연정: 제2당 기민/기사당연합 상징 검은색, 제4당 자민당 상징 노란색, 제3당 녹색당 상징 녹색이 합쳐지면 자메이카 국기 색깔이라고 붙은 별칭

사상 첫 ‘신호등 연정’ 탄생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출처=위키 커먼스
지난 7일 퇴임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출처=위키 커먼스

제1당과 제2당이 함께 연정을 꾸리는 대연정은 메르켈 총리가 4회 연임하는 동안 모두 3차례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양당이 차기 내각 구성에 타협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제1당이 된 사민당의 선택은 지금까지 집권 여당이었던 기민/기사당 연합을 배제하고 녹색당, 자민당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이른바 ‘신호등 연정’이 현실화하였다. 세 당은 연정 합의문에 합의한 후 각자 소속 정당에서 투표에 부쳐 추인을 받았다. 세 당의 당원들은 모두 압도적인 비율로 합의문을 승인했다. 

이제 새로운 독일 정부의 출현을 앞두고 있다. 이 신호등 연정의 함의는 무엇일까? 앞으로 독일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메르켈 전 총리는 중도 우파 성향의 정당을 이끌었다. 중도 좌파 성향의 정당과 손을 잡고 독일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지난 총선은 중도 좌파 성향의 정당을 1등으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는 유럽에서 EU를 주도하는 독일이 조금 ‘좌클릭’했다고 볼 수 있다. 제1당이 된 사민당이 손을 잡은 파트너는 녹색당과 자민당이다. 양당의 성격은 대략 (상대적으로 더) 좌파, (상대적으로 더) 우파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니까 중도 좌파 정당이 중도 우파 정당은 배제하고 좌파, 우파 정당과 한 지붕 세 가족 살림살이를 하겠다는 셈이다. 중도 좌파 정당이 자기들과 비슷한 성향의 좌파 정당과 함께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중도 우파 정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우파 정당에 손을 내미는 것은 그만큼 독일 사회 내부에 다양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새 연립정부의 구성과 주목할 장관들

독일 사회민주당 로고
독일 사회민주당 로고

사민당-녹색당-자민당 연립 정부는 어떤 노선을 택할 것인가? 도대체 중도 좌파-좌파-우파 정당이 공동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우리 정치 풍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독일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해하도록 해보자. 독일 정부는 모두 14개 부로 구성된다. 세 당이 각자 어느 부 장관을 차지했는지 보면 윤곽이 잡힌다. 

사민당: 총리, 내무부, 국방부, 노동사회부, 보건부, 개발협력부, 건설주택부 (총리 + 5부 장관)
녹색당: 경제기후보호부(부총리 겸임), 외교부, 식품농업부, 가족여성부, 환경부 (5부 장관)
자민당: 재무부, 법무부, 교통디지털부, 교육연구부 (4부 장관)

우리가 눈 여겨 볼 장관은 누구인가. 우선 사민당 몫인 내무부 장관에는 사상 처음으로 여성인 낸시 파에저가 임명되었다. 국방부 장관에는 크리스틴 람브레히트가 낙점되었다. 세 번째 여성 국방부 장관이다. 사민당 당수로 제9대 총리가 된 올라프 숄츠는 남녀 동수 내각을 공약했는데 국가 물리력의 중추인 경찰과 군대를 관장하는 자리에 여성을 앉혔다. 녹색당 몫의 외교부 장관은 국제법 전문가로 40세 최연소인 아날레나 베르코크다. 첫 여성 외교부장관이다. 메르켈 전 총리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을 요직에 배치하는 것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많이 의식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후임 숄츠 총리는 오히려 여성을 중용하고 있다.

녹색당 소속 장관들이 가져올 변화

녹색당이 피셔 및 슈뢰더 총리 재임 시절에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다가 2005년 이후에는 연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랬던 녹색당이 당당하게 재기했다. 기존의 경제에너지부가 기후 보호, 생태적 경제, 산업 전환을 포괄하는 경제기후보호부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녹색당 공동대표인 로베르트 하베크가 이끌게 된다. 비중이 대폭 커진 만큼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은 부총리를 겸임한다. 녹색당 소속이 외교부장관과 경제기후보호부장관이 되었으니 탄소 중립과 같은 환경 의제가 독일의 대외, 대내 정책에서 진지하게 다뤄질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번 연정 합의문은 독일의 탄소 중립 달성 시기를 2030년까지 앞당기는 것을 명시했다. 독일 산업계 전체가 단기간에 완전히 체질 개선을 해야 가능한 일인데 사민당과 녹색당 모두의 주요 관심사라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독일 제9대 총리로 취임한 올라프 숄츠 총리./출처=본인 페이스북(Photothek)
독일 제9대 총리로 취임한 올라프 숄츠 총리./출처=본인 페이스북(Photothek)

차기 독일 정부의 외교정책 전망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독일의 향후 외교정책 기조다. 독일의 기본 외교 노선은 EU 강화와 EU 리더로서 독일의 위상 유지다. 현재 EU의 현안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문제다. 이는 러시아 견제와 맞닿아 있다. 벨라루스는 알렉산더 루카센코 정권의 전횡이 극심한데 러시아가 뒤를 봐주고 있다. 크림 반도를 병합하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EU에 붙으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 다음은 중국 문제다. 중국은 독일에게 주요 무역 파트너다. 수출 기준으로는 3위, 수입 기준으로는 1위의 무역 파트너다. 실용주의자였던 전임 메르켈 총리는 중국 문제에서도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시했다. 미-중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는 상황이라 미국은 독일이 자기들 편에 서서 좀 더 강하게 중국을 압박하기를 원한다. 숄츠 내각이 독일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관계를 당장 틀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이전 정부보다 중국을 더 압박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의 의중을 따를 것이라기보다 EU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새 정부라도 국가 경영의 대계를 모색한다. 숄츠 총리는 정치색을 잘 드러내지 않고 실용 노선과 정치적 타협을 선호한다는 면에서 메르켈 전 총리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친기업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자민당과 독일에 녹색 인프라를 시급히 구축하려는 녹색당을 연정 파트너로 삼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판을 크게 한 번 바꿔보려는 야심도 느껴진다. 한국 정치가 2차 방정식이라면 독일 정치는 3차 방정식에 가깝다. 숄츠 총리가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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