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쇼생크 탈출’에는 주인공이 감방 벽을 뚫는 데 사용한 돌망치를 교도소장의 성서 안에 몰래 숨겨두는 장면이 나온다. 돌망치가 쏙 들어가도록 만든 홈의 첫 페이지가 출애굽기다. 신의 계시를 받은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으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탈출시키는 내용이니만큼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만큼, 아니 영화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흑인 노예들의 모세’라고 불렸던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1822~1913)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벼락치듯 찾아온 자유에의 열망

해리엇 터브만 기념관 외벽에 그려진 벽화 '나의 손을 잡으세요'. 벽을 허물고 자유 세상으로 이끌었던 해리엇의 일생을 상징하는 그림이다./출처=www.harriettubmanmuseumcenter.org
해리엇 터브만 기념관 외벽에 그려진 벽화 '나의 손을 잡으세요'. 벽을 허물고 자유 세상으로 이끌었던 해리엇의 일생을 상징하는 그림이다./출처=www.harriettubmanmuseumcenter.org

과거 미국에서 노예는 노예주의 합법적인 소유물이었다. 노예주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를 구매했다고 여겼고, 노예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강요된 고된 노동에 순응했다. 노예에게 자유는 애초부터 박탈당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자유에 대한 열망이 불현듯 운명처럼 찾아오고는 했다. 

해리엇에게는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옥수수밭에서 일하던 노예 소년이 무엇인가에 홀린 듯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감시원에게 바로 포착된 노예 소년은 해리엇이 잔일을 하고 있던 근처 상점 안으로 숨을 헐떡이며 도망쳐 들어갔다. 뒤따라온 감시원이 노예 소년을 붙잡고 있으라고 호령했는데 해리엇은 오히려 감시원을 막아섰다. 그 틈에 달아나는 노예 소년을 향해 감시원이 쇳덩어리 추를 냅다 던졌다. 하필 그 추에 앞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것은 당시 13살이었던 해리엇이었다. 

쇳덩어리에 맞은 충격으로 평생 두통, 환청, 환각에 시달려야 했던 해리엇은 통증이 몰아닥칠 때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던 또래 노예 소년을 떠올렸다. 22살이 되자 해리엇은 자유민인 흑인 남자와 결혼한다. 어릴 때 이름은 아라민타 로스였지만 남편 성을 따르고 이름도 해리엇이라고 개명했다. 자유민과 결혼한 이유 또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현실 안주형이었고 아내가 자유인이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좌절이 깊어만 가던 중, 해리엇은 남편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의 몸이 되기로 결심한다. 

흑인 노예들을 탈출시켜라!  비밀 조직 ‘지하 철도’

당시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백인 퀘이커 교도들이 중심이 된 노예 구출 비밀 조직 ‘지하 철도’(the Underground Railroad)'가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해리엇이 일하고 있던 농장에 백인 여성 퀘이커 교도가 찾아와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이 백인 여성은 비밀 조직의 멤버였다. 쿨쿨 자고 있던 남편에게 메모 한 장 남겨놓지 않고 한밤중에 집을 나선 해리엇은 근처 숲에서 기다리던 남동생 2명과 함께 그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반갑게 맞이한 백인 여자는 갈아입을 옷과 먹을 것을 주고 다른 비밀조직원이 있는 집까지 이동 경로를 알려줬다.

지하 철도 조직은 이름과 달리 철도를 이용해서 노예들을 피신시키지 않았다. 철도 노선이 뻔해서 추격당하기 쉬웠기에 주로 육로와 강을 통해서 노예를 탈출시켰다. 그런데도 이름이 지하 철도였던 것은 노예를 화물, 접선지를 역 이름으로 해서 암호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미국 남부 주와 북부 주의 경계가 되는 지역에서부터 탈출 루트가 시작됐다. 남부 주들의 항의로 1850년부터 북부로 탈출한 노예들을 송환하는 법이 만들어지자 최종 행선지는 캐나다까지 연장되었다. 지하 철도 조직은 남북전쟁이 끝나던 1865년에 공식 해체될 때까지 3만~10만 명의 노예를 탈출시켰다고 한다.

비밀 조직의 핵심 요원으로 눈부신 활약

해리엇 터브먼 실물 사진으로 남북전쟁 후 뉴욕에 정착했을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리엇은 해방된 흑인 노예들의 복지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했다./출처=미국 의회도서관
해리엇 터브먼 실물 사진으로 남북전쟁 후 뉴욕에 정착했을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리엇은 해방된 흑인 노예들의 복지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했다./출처=미국 의회도서관

8남매 중 한 명이었던 해리엇은 남동생 2명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두고 온 나머지 형제자매에 대한 걱정에 늘 노심초사했다. 노예주가 남은 형제자매들을 다른 농장에 팔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 탈출시키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길을 다시 가야 하는 위험한 여정이었다. 이때도 비밀 조직의 도움을 받았는데 영민하고 용감해서 형제자매들을 모두 안전하게 데리고 온 해리엇을 비밀 조직의 간부가 눈여겨보았다. 지하 철도 조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했고, 해리엇은 남부 주 곳곳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많은 노예를 탈출시켰다. 

남부 노예주들에게는 눈엣가시여서 4만 달러 현상금이 걸렸는데도 한 번도 잡히지 않았던 해리엇의 담대함과 기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해리엇을 잡으려고 많은 노예 사냥꾼이 혈안이었지만 해리엇은 보란 듯이 벌건 대낮에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종종 닭을 한 마리 끼고 다녔는데 노예 사냥꾼들과 마주치면 일부러 닭을 풀어놓고 주인님의 닭인데 도망쳤어요 못 잡으면 맞아 죽어요 하며 허둥지둥 쫓는 시늉을 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닭을 쫓는 해리엇을 보고 노예사냥꾼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그냥 지나쳐버리고는 했다.   

흑인 노예에서 북군 작전 참모로 

1861년에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지하철도 조직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때가 남북전쟁 기간이었는데 전쟁 와중이라 노예를 탈출시키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남부 지역의 주요 도로와 교통망을 꿰고 있던 해리엇에게 북군 지휘부가 정보 수집을 요청했다. 남군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고, 주요 전쟁 물자는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직접 발품을 팔아서 다 확인한 후 보고했다. 북군의 밀정 역할을 했을 때 해리엇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지만 할머니로 변장해서 거침없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1863년 5월에는 제임스 몽고메리 북군 장군의 컴바히강 습격 작전에 참모로 참여했다. 해당 지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는 해리엇의 인도로 북군 병력이 증기선 3척에 나눠타고 그 일대의 남군 보급기지 기습에 성공했다. 흑인 노예 출신, 그것도 여성이 남북전쟁에서 군사작전을 이끈 것은 전무후무하다.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주에서는 부상병 치료를 위해 약초를 찾아 치료약을 만들어 남군, 북군, 흑인, 백인 가리지 않고 간호했다. 

전쟁 후에도 계속된 봉사와 헌신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이 공식화되자 흑인 인권과 여성 참정권 신장에 헌신했다. 전쟁 직전에 뉴욕주 오번에 땅을 구입해서 집을 지은 후 하숙집으로 운영했는데 해리엇의 도움으로 노예 신분을 벗어나 자기 집에서 3년간 하숙하던 청년과 사랑에 빠져 재혼했다. 새 남편은 20살이나 연하였다. 백인 여성 작가가 터브먼의 전기를 쓰겠다고 해서 지난 일들을 구술하며 약간의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 하숙집 운영과 이런저런 사소한 일을 통해서 번 수입은 모두 전쟁미망인, 고아, 상이군인들을 돕는데 썼다. 

전쟁 당시 군사 작전을 이끈 공로가 있음에도 흑인인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국 정부는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고 군인연금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미적거리는 정부를 상대로 군인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계속 민원을 넣었고 마침내 1899년부터 월 20달러의 연금을 수령하게 되었다. 연금은 대부분 저축해서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양로원을 뉴욕주 오번에 설립했다.

20달러 지폐 모델로 거론되는 이타적인 일생

해리엇은 1913년 향년 90세로 오번의 자기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포트 힐 묘지에서 군 장례로 치러졌고 그곳에 영면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해리엇 터브먼을 기리기 위해 오바마 정부 때 20달러 지폐 모델로 교체하고자 했다. 기존 20달러 지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을 주도하고 다수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대농장주였던 앤드루 잭슨의 초상화가 있었으니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것을 후임 트럼프 대통령이 백지화시켰는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재추진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모든 위대한 꿈은 꿈을 꾸는 사람과 함께 시작한다. 세상을 바꿀 별들에 닿을 힘, 인내심, 열정이 당신 속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해리엇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의 꿈과 그 꿈을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와 실천력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 해리엇의 일생이 그것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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