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도시’ 시카고는 매력적인 곳이다. 배트맨이 활약하는 고담 시티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어둡고 음습한 도시 같지만 실제로는 현대 건축물의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건물이 즐비하고 활력이 넘친다. 다운타운 중심가를 종으로 관통하는 미시간 에비뉴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유서 깊은 로욜라 대학이 나타난다. 건물을 끼고 서쪽으로 몇 블록을 가면 빌딩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시 재단 도서관(Poetry Foundation Library) 건물과 만나게 된다.

시를 발표하고자 하는 모든 시인을 위한 전문지 <포에트리>의 탄생

시 재단 도서관은 시집만 3만 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동시집 3천 여권이 포함되는데 단일 장르 도서관으로는 영미권에서 손꼽히는 규모다. 유명 시인들의 희귀본 시집도 다수 갖고 있다./필자 제공
시 재단 도서관은 시집만 3만 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동시집 3천 여권이 포함되는데 단일 장르 도서관으로는 영미권에서 손꼽히는 규모다. 유명 시인들의 희귀본 시집도 다수 갖고 있다./필자 제공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시와 관련된 재단이 만든 시집 전문 도서관이다. 소장 시집이 3만 여 권이라 영미권에서는 단일 장르 도서관으로는 손꼽히는 규모다. 도서관과 관련해 두 명의 여성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시 전문 월간지 <포에트리 Poetry>를 1912년에 창간한 해리엇 먼로(Harriot Monroe)다. 청년 시절부터 촉망받는 작가이자 시인이었지만 시를 발표할 매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다가 시가 실려도 고료는 형편없이 적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카고 트리뷴>의 객원 특파원을 하며 예술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딜레마는 지면을 허락하는 전문지가 별로 없다는 것과 시만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리엇 먼로는 사후에도 사람들이 자기를 계속 기억하도록 생전에 문학적 성취를 이루겠다는 열망에 차 있었다. 차츰 그 열망은 더 많은 사람이 시를 읽도록 더 많은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전문지를 창간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시카고 트리뷴에서의 인맥을 활용해 100여 명의 사업가에게 창간 계획을 밝히고 5년간 구독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창간 초기에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재정적인 기반부터 먼저 마련했던 것이다. 꼼꼼한 준비 과정을 거쳐 드디어 <포에트리>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해리엇 먼로는 창간사에서 어떤 시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잡지의 목적은 시인이 학맥, 인맥, 무슨 파에 속했는지에 따라 선별해서 싣는 것이 아니라 오직 최고의 시를 싣는 것이라고 했다. 대중 잡지가 구색을 갖추고자 선심 쓰듯, 어쩌다 시인에게 지면을 할애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일정 수준 이상이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연 시 전문지의 등장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시인들의 요람

해리엇 먼로는 19세기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자신도 그런 시 스타일에 익숙했지만 <포에트리>의 편집장으로서는 모험심이 가득했다. 실험정신이 충만한 시인들을 계속 발굴해 소개했고, 1910년대 영미 시단을 풍미한 반낭만주의 운동인 사상주의(Imagism) 객관주의(Objectivism)의 요람이 됐다. 그리고 <포에트리>의 실험정신은 지금까지 유지되는 전통이다.  

모두에게 오픈돼 있었으니 많은 시인과 출판사가 시 게재와 평론을 요청하며 시집을 <포에트리> 편집실로 보냈다. 영국과 미국 도처에서 보내진 다양한 시집으로 편집실은 금방 가득 찼다.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근처 뉴베리 도서관에 협조 요청을 했다. 도서관 측의 도움으로 빈 서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시집들을 비치해두게 되었다. 

창간 14주년이 되던 1936년에 해리엇 먼로는 마추픽추를 방문했다가 뇌출혈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창업자이자 편집장이고 <포에트리>의 분신이었던 해리엇 먼로가 사망했으나 출판사 측은 사명을 근대시협회(the Modern Poetry Association)로 변경하고 명맥을 잘 유지했다. 

자기 시를 안 실어줘도 계속 거액을 기부한 시 애호가

두 번째 인물은 루스 릴리(Luth Lilly)다. 인슐린, 항암제, 항우울제로 유명한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 앤 컴퍼니의 창업주 커넬 일라이 릴리(Colonel Eli Lilly)의 손녀다. 루스 릴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데 평생 8억 달러 이상을 공익 목적으로 각종 교육, 문화, 예술, 의료 재단에 기부했다. 

문학소녀였던 루스 릴리는 시 애호가이자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했다. 종종 <포에트리>에 기고했지만 기준 미달이었는지 한 번도 실리지 못했다. 기분이 나빴을 만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고 생존해 있는 미국 시인들을 위해 공로상을 만들어 매년 10만 달러의 상금을 <포에트리>에 쾌척했다. 또한 21~31세 청년 시인들을 위한 격려금을 별도로 지원했다. <포에트리>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청년 시인을 매년 5명씩 선정해서 지급한다.  

우리나라에도 시 전문 잡지나 출판사가 몇 있는데 다들 규모가 그만그만하다. 만약 매년 몇억 원씩 꾸준히 기부하는 독지가가 있다면, 그리고 그 독지가가 아마추어 시인이라 매번 시를 보내온다면 실어주지 않을 곳이 있을까? 수준에 못 미쳐 출판사가 계속 게재하지 않을 경우, 무시당했다는 느낌에도 독지가는 거액을 기부하게 될까? 여러모로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이다. 

무려 2억 달러를 기부 받고 높이 도약하게 된 <포에트리>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을 만난다. 건축가는 번잡한 바깥 세상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쉬어가자는 의미로 정원을 조성했다고 밝혔다./필자 제공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을 만난다. 건축가는 번잡한 바깥 세상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쉬어가자는 의미로 정원을 조성했다고 밝혔다./필자 제공

<포에트리>에 대한 루스 릴리의 재정적 지원은 꾸준했는데 진짜 놀라운 일은 2002년에 벌어졌다. 자기 몫의 일라이 릴리 앤 컴퍼니 주식 1억 달러어치를 <포에트리>에 희사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주식 이전은 다음 해에 이뤄졌는데 그 사이에 주가가 2배로 뛰어 <포에트리>가  실제로 받은 기부액은 무려 2억 달러였다. 현재 환율로 2600억원이 넘는 거액을 시 전문지에 선뜻 준 것이다. 

<포에트리> 측은 거액의 후원금을 기부자의 뜻에 맞게 잘 집행하려면 구멍가게 수준의 조직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기존 협회의 이름을 ‘시 재단 Poetry Foundation’으로 바꾸고 조직을 크게 확장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재단이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인근 도서관 서가에 있던 다량의 시집을 보관할 별도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건축가 존 로난(John Ronan)에게 설계를 의뢰했고 ‘시 재단 도서관 Poetry Foundation Library’이 2011년에 완공됐다. 

시의 본질을 고스란히 담아낸 시 재단 도서관 건물

도서관은 특별한 디자인의 건물이 많기로 유명한 시카고 다운타운에서도 디자인 면에서 주목받는 건물이다. 건축가는 시를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 심정으로 설계했다고 하는데 내부로 들어가면서부터 다른 차원을 체험하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철제 기둥이 양측으로 나란히 세워진 입구로 들어가면 정원을 만나게 된다. 번잡한 도시 한 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조용한 사색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정원을 통과하면 L자 형태의 도서관 건물을 만난다. 2층짜리 서가에는 영미권의 각종 시집 3만 여권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전면과 측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안에서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조다. 현실에서 다른 차원을 느끼게 하고, 다른 차원에서도 현실을 보게 하는 시의 본질과 일맥상통하는 건물이다. 

시와 사람들의 거리를 좁히다

시 재단은 최고 수준의 시집 컬렉션을 갖춘 도서관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시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 페스티벌을 개최해서 시와 사람들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를 쓴다. 내게 제일 인상적인 것은 미국 전역의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개최하는 ‘큰 소리로 시 낭독 Poetry Out Loud’ 행사다. 직접 고른 시를 암송하는 대회인데 1등은 2만 달러, 2등은 1만 달러, 3등은 5천 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1등한 고등학생에게 2천6백만 원의 상금을 주는 것이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시를 잘 암송하는 것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셈이다. 상금의 액수가 액수이니만큼 당연히 시 암송 대회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다.

2019년도 대회에서 1등 상을 받은 학생이 19세기 영국 시인 찰스 램의 ‘무심한 잔인함 Thoughtless Cruelty’을 낭독하는 장면을 감상하시기 바란다. 

시의 힘은 강하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신승한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은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라는 세간의 불안과 우려를 불식시켜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취임식을 빛낸 것은 역대 최연소로 축시를 낭송한 어맨다 고던(당시 22세)이었다. 고던의 자작시 ‘우리가 오르는 언덕 The Hill We Climb’은 지난 대선이 미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앞으로 미국 사회가 어떤 풍랑을 헤쳐가야 하는지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는 지연될 수 있어도 결코 영원히 패배할 수 없다”는 구절은 양식이 있는 미국인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동기부여를 했다. 이번 미 중간선거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후보들이 의석을 다수 차지하는 ‘레드 웨이브’가 실현되지 않았다. 트럼프 망령의 부활을 막고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해일을 막아내는 방파제를 만드는데 어맨다 고먼의 시가 일조했으리라 믿는다. 시의 힘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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