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자 한겨레신문에 ‘차별금지법은 생존의 요구다’ 라는 광고가 4382명의 이름으로 11면 전면에 실렸다. 이 광고가 아니더라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차별금지법은 사회 소수자들의 요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표로 논란이 됐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많이 변화해서 실제 여론조사로는 찬성이 압도적이다. 2020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80%가 넘는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당장은 법이 제정될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차별금지법은 곧 동성애에 대한 인정과 허용이어서, 이것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고, 실제 개별의원들 중에서도 법에 찬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런 논란을 피해 가기 위해 이 법이 차별금지법으로 불리기 보다는 평등법으로 불리길 원하고 있기도 하다.

차별금지법은 공동체 내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제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것은 당위적 명제를 넘어서서 이미 우리 삶과 생활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보적 가치나 의식을 표현하는 도덕적 의제가 아니라 우리 삶과 생활을 낫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예컨대 코로나19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서 옮거나, 옮길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 확진자가 되었다면 마치 그 사람은 죄인인 양 혐오하고 차별하는 일이 벌어진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한국인이 겪는 일상에서의 혐오는 우리 사회 모습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일이다.

미국의 스노보드 챔피언이고 이 분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클로이 김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21살의 젊은 여자 선수가 나라를 위해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지만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증오범죄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미국에 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코로나19 이후 증가하고 있다. 길거리에서 행해지는 묻지마 폭행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는 것을 보면 코로나19를 계기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늘어났다고 짐작할 수 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이나 호주 등 거의 모든 나라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아시아국가 사람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은 예외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우리가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차별의 대상이 되면서 우리 내부에서는 우리가 차별과 혐오를 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성적 지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올해만 해도 변희수 하사와 김기홍 씨 등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므로 다시,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것은 더이상 도덕과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일상의 ‘안전’과 관련된 의제이다. 공동체 내에서 ‘다른’ 생각과 상태를 폭력적으로 제거하려는 것으로부터의 ‘보호’와 관련된 것이다. 누구나 ‘다른’ 생각과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차별금지법은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한 법이다.

‘차별금지법은 생존의 요구다. 우리를 숨 쉬게 하는 법이다. 우리는 용기 내지 않아도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원한다. 용기는, 저마다의 꿈을 위해 도전할 때 쓰고 싶다. 존재 자체에 용기를 요구하지 마라. 차별금지법은 자유가 시작되는 자리다. 우리가 고유한 존재로 존중받는 자리, 동료시민으로 함께 서는 연대의 자리다. 차별금지법은 평등의 발판이다. 나로 살기 위해, 너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대항할 권리를 원한다’(차별금지법은 생존의 요구다, 2021.4.8, 차별금지법제정 시국회의 성명).

차별과 혐오로부터의 사회적 안전은 이제 사회 소수자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자신들의 도덕률을 강조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주장에 기대어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자신의 도덕률을 위해 공동체 구성원의 삶에 대해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조차 혐오와 차별로 인한 위협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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