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난하다.” 2019년 한 설문조사에서 스스로 가난하다고 응답한 사람 중 11%가 연봉 6000만원 이상, 52%가 자가 소유자였다고 한다. 온라인에서는 20억짜리 집을 소유하고도 ‘나는 전형적인 하우스 푸어 중산층’이라는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을 자처하는 시대, 진짜 가난과 가짜 가난은 따로 있을까.

신간 ‘빈곤 과정’은 20년간 가난에 관해 연구해온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빈곤에 주목해 쓴 글이다. 인류학자인 저자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빈곤을 학술적·실천적 주제로 등장시켜온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여러 현장을 기웃거리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빈곤을 새롭게 발견하고 쟁점화하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소개했다.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책 표지 이미지./출처=글항아리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책 표지 이미지./출처=글항아리

책은 빈곤을 ‘과정’이라고 본다. 때문에 ‘빈곤이란 무엇인가’ ‘빈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돈 없고 집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 상태, 물질적 결핍과 경제적 고립, 약자, 피해자, 수급자, 의존자’ 등의 전형적 분류로 답변돼왔던 이 질문에 답하기를 일부러 실패하고 내려진 답을 번복하면서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도시 빈민, 공장노동자, 수급자, 불안한 청년, 농민공, 이주자, 여성, 토착민, 노예, 역사 이전부터 착취당해온 비인간까지…. 책에서 이야기하는 빈자에는 경계가 없이 외연이 계속 확장된다. 인간이 살아온 사회의 통치방식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빈곤의 정의와 개념이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내가 진정으로 어떤 인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책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말을 통해 빈곤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다. 사회에서는 누가 빈자인지를 가려내고 그의 빈곤을 처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뿐, 그가 어떤 인간인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은 가족, 엄동설한에도 전기장판을 들여놓을 수 없어 추위에 시달리는 쪽방 주민,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더 시달리는 이주자 등 미디어에서는 결과로서의 빈곤만을 제시한다. 그 결과 가난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고, 한명 한명 개별의 서사보다는 뭉뚱그려진 전체의 빈곤 문제 해결만 앞세워질 뿐이다.

저자는 빈곤과 빈민을 의제로 삼아온 지 20년이 넘었고, 2012년부터 학부에서 강의 중인 ‘빈곤의 인류학’ 수업도 10년이 됐다. 그러는 동안 노동, 분배, 복지, 이주, 철거, 쪽방촌, 홈리스, 청년, 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동시대의 빈곤을 의제화했다. 아울러 기후위기, 기본소득, 페미니즘, 팬데믹 등 최근 현실의 이슈와도 연결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빈곤 과정=조문영 지음. 글항아리 펴냄. 428쪽/ 2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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