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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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복잡다단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토론을 할 때는 지향점에 대한 단단한 합의가 필수적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논제일수록 지향점에 대한 선제적 합의 없이 의미있는 결론에 이르기는 어렵다. 이러한 '선제적 합의'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곳은 가장 많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 바로 국회다. 입법의 영역에서는 '기본법'을 제정하는 일이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후속 입법을 논의하기 위한 전제를 마련하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경제란 과연 무엇인가? 사회적경제조직들을 위한 통일된 지원정책이 필요한가? 비영리법인은 사회적경제의 영역에 포섭되는가? 협동조합은 국가의 지원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협동조합이 지원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거기에는 농협이나 수협과 같은 개별법상 협동조합들도 포함되는가? 사회적경제 영역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해서 반드시 선제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질문들이다. 입법자들이 이상의 질문들에 일정한 합의를 할 수 없다면, 우리나라는 사회적경제 정책의 방향성조차 제시하기 어렵다. 이 질문들은 국회에서 사회적경제에 관한 세부적인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반복될 가능성이 높고, 그에 따라 지난하고 결론 없는 논쟁을 거듭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제정하는 일은 곧,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 그 답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다. 위에서 열거한 질문들은 실제로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 과정에서 국회 안팎에서 제기된 질문들이기도 하다. 현재 계류 중인 사회적경제기본법(안)들은 사회적경제의 정의, 사회적경제의 범위, 사회적경제 정책의 수립 절차 및 실행방법 등 반드시 입법적 결단을 내려야 할 중요한 사항들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경제의 근간에 관해 진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제서야 비로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경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지원대상을 선정하기 위한 기준을 구체화하고 지원의 수준과 방법을 결정하는 일 역시 그러한 토대 위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지향점에 대한 합의에 이르기에 앞서 '사회적경제'를 구축하기 위한 입법을 벌써 상당 부분 진척시켰다. 여기에는 장점도 있었고, 단점도 있었다. 2007년에는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2012년에는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됐다. 작년에는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소셜벤처기업'에 관한 규정이 신설되기도 했다. 모두 기념비적인 입법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적경제의 개념과 목적에 대한 단단한 합의 없이 설계된 법제라 체계정합성의 측면에서는 한계가 뚜렷하다.

단적인 예로, 공익적 목적이 매우 분명하고 이미 협동조합 기본법에 따라 경영공시의무 등 다양한 법률상 의무를 지고 있는 사회적협동조합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기업 육성법상 제 정책의 지원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소셜벤처기업으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다시 별도의 '판별'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렇게 인증이나 판별을 받고나면 각 법률에 따른 별개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각 법률을 소관하는 부처도 고용노동부(「사회적기업 육성법」), 기획재정부(「협동조합 기본법」), 중소벤처기업부(「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으로 상이하다. 각 부처의 관리·감독 역시 그 기준이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적경제 영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경제조직들이 다양한 종류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 법률이 그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들의 다양성 또한 더욱 빛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처럼 사회적경제조직이 입법자에 의해 여러 법률에서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소셜벤처기업 등으로 나뉘어 불리고, 이들을 위한 정책도 법률을 따라 분절되어 있다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사회적 목적을 큰 틀에서 조망할 기회를 잃게 된다.

사회적경제조직들을 한 데에서 규율하는 법률 없이는 이들에 대한 지원의 수준, 그에 따른 규제의 수준을 입법자가 종합적으로 논의하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 칸막이를 그대로 두면 어떤 분야에서는 행정의 공백이 생길 것이고, 어떤 분야에서는 행정의 중복이 생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수의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이 기재부, 고용부 등 복수의 중앙행정기관이 힘을 모아 '한국사회적경제원'을 설립하도록 한 것 역시 큰 의미가 있다.

사회적경제 영역을 통일성있게 규율하려는 시도는 유럽에서도 있었다. 스페인은 2011년에 사회적경제법을, 프랑스는 2014년에 사회연대경제법을 제정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경제 기본법의 제정을 초석으로 삼아, 사회적경제 정책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의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물론 사회적경제 기본법 제정 자체를 성과로 볼 수는 없다. 기본법이 제정된다고 하여 개별법상의 온갖 난맥들이 일거에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사회적경제 정책의 방향성을 담은 입법자의 최소한의 결단이다. 그리고 그 결단 아래 새로이 수립될 정책의 깊이, 그 정책의 영향 아래 활동할 사회적경제조직들의 활약상에 따라 사회적경제 기본법의 성패는 결정될 것이다. 

김용진 법무법인 더함 변호사
김용진 법무법인 더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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