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영 농부님!

두 주 전 저희 포도원에서 시집 보낸 포도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지요. 4년생 포도나무여서 뿌리가 꽤 길게 뻗었지만, 이동하기 편하게 뿌리를 짧게 절단했는데요. 실뿌리가 많지 않아 활착이 더딜 것으로 보였습니다. 잎은 잘 나오고 있는지요? 포도나무 그늘에서 마을 요양원 노인분들이 쉬기도 하고, 잘 익은 포도를 마음껏 따먹게 하시겠다며 구하러 오셨지요. 좀 늦게 심었지만, 올해 잘 키우면 내년에는 그루 당 몇 송이씩 포도를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사과, 배에 비해 포도는 1년생 가지에서 착과하는 습성으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열매를 맞이할 수 있지요.

마을요양원 할머니들이 정원가꾸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이상배 농부
마을요양원 할머니들이 정원가꾸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이상배 농부

농부님을 뵌 지 벌써 22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천안시 북면이라는 어느 시골마을 축사를 개조해서 집과 교회를 겸해서 사용하고 계셨지요. 마을 노인분들의 논을 대신 갈아드리고, 이동수단이 없는 노인분들을 면내에 모셔다드리는 일 등을 내 일처럼 했지요. 제가 갔을 시점에 8년을 그렇게 보냈으니 이제 30년을 농촌마을에서 살아오셨네요. “지난 30년은 농촌이라는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파라다이스를 경험한 것 같아요. 전설적인 3총사 할머니를 만났고요. 많은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세 아이가 너무 아름답게 컸어요. 아이만이 아니라 저 자신이 많이 컸어요. 그분들의 돌봄으로 무일푼의 농촌생활을 거뜬히 할 수 있었지요. 땅도 빌려주셔서 농사해서 먹고살 수 있었고, 축사도 빌려주셔서 집과 교회로 활용할 수 있었지요.”

22년 전 정훈영 농부와 삼총사 할머니(좌측부터 석원이할머니, 돋우물 할머니, 동원이 할머니). 필자가 월간 빛과소금 객원기자로 취재 갔을 때의 사진이다. 이 농부 노인분들이 30세 중반의 농부를 아름답게 빚고 있었다./출처=정화영 사진기자
22년 전 정훈영 농부와 삼총사 할머니. (왼쪽부터) 석원이할머니, 돋우물 할머니, 동원이 할머니. 필자가 월간 빛과소금 객원기자로 취재 갔을 때의 사진이다. 이 농부 노인분들이 30세 중반의 농부를 아름답게 빚고 있었다./출처=정화영 사진기자

22년 전 처음 뵙고 매년 한 두 번은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돋우물 할머니께서 언제나 살갑게 맞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동원이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로 대해주셨지요. 여우리할머니는 짓궂게 결혼하지 않냐고 만날 때마다 묻곤 하셨지요. 앞으로 우리가 늙어가면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노인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흙 속에서 고된 노동을 통해 자기를 다 소진하고 텅 빈 노인분들 뵙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나이 들어도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자립 자치의 존엄을 끝까지 잃지 않는 농부노인이 그립습니다. 이분들이 빚어낸 양육 이야기, 마을공동체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애경 아내 농부님이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할머니들과 같이 일할 때, 식사할 때 예수님을 만나요. 그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깊이를 만납니다. 살아온 인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여자인가 싶습니다. 그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화가이기도 한 이애경 농부님은 할머니들의 초상화를 맨 캔버스에 그릴 수가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황토 흙물을 바르고 말리고를 여러 차례 한 후 황토 캔버스에 그분들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평생 흙에서 살아낸 분들의 얼굴은 흙에다 그리는 것이 제격이라는 말씀이지요. 화가로서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자기를 찾는 몸부림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시작하며 촌부 할머니들 속에서 자기를 그려간 여정을 황토화폭 초상화로 형상화한 것이지요.

이애경 농부 화가는 황토캔버스에 성스런 농부 노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꼭대기할머니, 돋우물할머니, 여우리할머니, 석원이할머니. 불후의 명작이다. 도시의 청년들과 농부 노인의 콘텐츠를 만나게 하자./작품=이애경 농부 화가, 사진=이상배 농부
이애경 농부 화가는 황토캔버스에 성스런 농부 노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꼭대기할머니, 돋우물할머니, 여우리할머니, 석원이할머니. 불후의 명작이다. 도시의 청년들과 농부 노인의 콘텐츠를 만나게 하자./작품=이애경 농부 화가, 사진=이상배 농부

풍족하지 않는 농촌생활 속에서도 농부님의 세 아이들은 모두 인간미 넘치는 성인이 됐습니다. 둘째 아들 산우리는 제가 방문할 때면 삼촌 삼촌 하며 붙임성 있게 따랐지요. 목욕탕도 같이 가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다 커서 관광경영학과 학생이 됐습니다. 큰아들 다우리는 사진을 전공해서 광고회사 영상제작을 하고 있다는 얘길 들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막내 따님은 서울대 음대를 들어가 첼리스트로서 잘 성장하고 있지요. 돈이 늘 달리는 농촌생활을 하며 어떻게 키웠나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에서 돈 대준 것은 거의 없고 자기들이 알아서 대학가고 장학금 받고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농촌 노인분들이 잘 키워주신 것 같아요. 사랑을 많이 받고 커서 그런지 자기답게 다들 잘 컸습니다. 저희가 혼자 키웠다면 이렇게 키우지 못했어요.” 마을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삼총사 할머니 중 두 분은 별세하셨다면서요. 돋우물 할머니만 살아계시는데, 90세가 넘으셔서 아들이 사는 도시에 가 계신다면서요. 농부 노인의 종말시대입니다. 자연에서 온 삶을 살아내고, 자기 모두를 내어준 노동으로 비워진 주름진 삶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품고 따뜻하게 보듬어 안은 노인분들이 하나둘 떠나는 슬픈 시대입니다. 이분들이 세상을 이토록 정성스럽게 만들어 갔는데, 세상은 이분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농촌을 지탱하는 것은 젊은 대농들이 아니라 그나마 살아계신 농부 할머니들입니다. 할머니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텃밭을 가꿉니다. 아침을 준비하고 할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립니다. 빨래해서 널고 옆집 포도원 봉지 씌우러 갑니다. 사과 과수원 일도 그렇고, 무 솎는 일도 그렇고, 양파심고 거두는 일도 그렇고, 시금치 따는 일도 그렇고, 풀매는 것도 그렇고 뭐하나 할머니 없이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는 저녁하고 설거지합니다. 빨래 개면 하루가 갑니다. 텃밭의 옥수수와 단호박을 따서 아들네에 부쳐줍니다. 주말에 아들 며느리 손자가 올라치면 이것저것 내옵니다. 갈 때는 한 아름 싸주지요. 우리 사회를 인간답게 지탱해주는 가장 기저에는 농부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산업화 이전 생태적 삶을 경험한 살아계신 문화유산으로서의 농부 할머니들 말입니다. 세월을 이길 수 없어 한분 한분 독거노인으로 외롭게 지내거나 연고 없는 요양원으로 외롭게 가게 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살아온 정훈영 농부님이 요새 하고있는 도란도란사회적협동조합에서 마을요양원 운영은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요. 30여 년을 동고동락한 마을 노인분들의 외로운 여생을 가만히 보고 있을 분이 아니지요. 지역에서 같이 지내 알고 있는 노인분들이 서로 의지가 되게 하는 마을 요양원은 지금 한국농촌에 가장 시급한 모델입니다. 이 노인분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분들이 사라지면 수십만 년 동안 형성된 인간문명의 유산이 일시에 사라지게 될 형국입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저는 무섭게 다가옵니다. 자연이 키워낸 노인이 없는 시대! 과연 인간다운 시대일까요?

도란도란협동조합 마을요양원 전경이다. 정훈영 농부가 1층 양옥과 2층 한옥으로 손수 지은 건물이다. 기와마다 색감을 다르게 한 것이 좋다./사진=이상배 농부
도란도란협동조합 마을요양원 전경이다. 정훈영 농부가 1층 양옥과 2층 한옥으로 손수 지은 건물이다. 기와마다 색감을 다르게 한 것이 좋다./사진=이상배 농부

그나마 생존해 계신 농촌 노인분들의 삶의 콘텐츠가 아카이브로 구축되어야 합니다.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노인분들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신농활프로젝트와 함께 농촌 노인의 콘텐츠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애경 농부님처럼 농부 노인의 얼굴이 그려져야 합니다. 농부노인의 이야기가 한국사회에 공유돼야 합니다. 정책자금 수천억을 투입해서 젊은이들로 하여금 노인 자서전을 쓰게 해야 하고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게 해야 합니다. 소설과 시나리오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작품이 나와야 합니다. 이젠 국제판 ‘님아’ 시리즈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노인 콘텐츠에 목마른 시대입니다.

저는 정훈영 농부님의 노인과의 삶을 보며 소망을 갖게 됩니다. 갈등과 반목이 깊은 한국사회를 통합하는 최고의 사회혁신가는 농부 노인이라고요. 문화한국으로 견인하는 최고의 콘텐츠는 농촌 노인이라고요. 많은 농촌 노인들이 산업형 요양원으로 외롭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한국 농업 정책이 사회적 농업을 대폭 확대하여 제2의 제3의 정훈영 농부님 같은 젊은이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저 공동화 되고 있는 농촌에 정훈영 농부님이 운영하는 마을 요양원 형태가 일자리 창출사업의 핵심으로 부각돼야 합니다. 많은 사회적경제 청년 일자리로 격려돼야 합니다. 노인분들이 갖고있는 수 만 년의 농업문화유산과 삶 모두를 기록하고 아카이브하는 일을 할 때입니다. 농업 그린뉴딜은 스마트팜이 아닙니다. 농촌 노인의 존엄을 경축하고, 그분들의 삶으로 사회와 문화를 풍성히 하는 것이 그린뉴딜의 핵심입니다. 노인은 인공지능의 각박한 시대에 마지막 남은 사랑의 교과서요 지혜의 보고입니다. 앞으로 10년 농촌 농업 정책의 핵심은 농부 노인입니다. 정훈영 농부님 앞마당 포도나무에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때 즈음이면 농촌 노인의 이야기도 한국사회에 주렁주렁 열리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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