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열에는 여성이 드물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에 의하면 2019년 기준 자연·공학계열 전공으로 입학한 전체 학위과정(전문학사·학사·석사·박사) 입학생 중 여성은 전체의 30%도 안 된다. 그중에서도 이학이 아닌 공학 전공자는 더 드물다. 같은 해 자연계열 여성 입학생 비율은 51%이었는데, 공학계열은 21%에 그쳤다. 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 중 대학 진학자가 5명 중 1명도 안 되던 1977년. 학부는 이학을, 박사는 공학을 선택한 여성이 있다. 바로 안혜연 WISET 현 소장이다. 안 소장은 이화여대 수학과에서 학사·석사를 따고,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삼성SDS 부장, 시큐어소프트 부사장, 파수닷컴 부사장 등을 거치며 산업계에서 일했다.

여성과학기술인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 과학기술 지식인으로서 현장을 누볐던 안 소장의 이야기를 듣고, 지난 2년간 종합 지원 기관의 장으로서 후배들을 키우기 위해 했던 노력과 고민을 묻기 위해 그를 만났다.

취임 2주년을 맞은 지난 4월 15일, 강남구 WISET 소장실에서 안혜연 소장을 만났다.
취임 2주년을 맞은 지난 4월 15일, 강남구 WISET 소장실에서 안혜연 소장을 만났다.

“학부에 입학하고 처음 ‘컴퓨터’를 접했어요. 미국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교수님이 수학과 안에 과목을 만들었거든요. 낯설었지만 너무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교내에 관련 과목이 덜 열려서 다른 학교까지 가 들을 정도로요. 영어 원서를 구해 읽었는데, 인공지능(AI) 관련 내용이었어요. 1970년대에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기특하죠. (웃음)”

지금보다도 여성 공학인이 드물었던 시절, 안 소장이 컴퓨터공학을 공부한 건 앞으로 성공할 신기술 분야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이런 기대는 기업에 발을 들이니 현실이 됐다. 당시 기간통신사업자였던 데이콤에 입사해 전산 네트워크 구축 업무를 하면서, 학문으로 접한 내용을 하드웨어로 구현하는 매력에 빠졌다. 공채 2기로 시작해 회사의 급성장을 함께하다가 다시 학문에 갈증을 느꼈다. 남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안 소장은 MIT에서 무선 네트워크 프로토콜 박사 학위를 따고는 다시 산업 현장으로 갔다. 삼성SDS에서 보안 전문가로 일하다 시큐어소프트, 파수닷컴 등 벤처기업으로 옮겼다. 안정적이고 정적인 생활에는 매력을 못 느꼈다.

“여자니까 집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아, 미국에서 대학원생 시절 육아를 병행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적은 있어요. 그런데 그만해야겠다는 마음은 안 들었어요. 할까 말까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성격이에요. 그냥 하면 되는 거죠.”

"여성 과기인 양성은 세계 트렌드"라는 안 소장. 여성은 수동적인 지원 대상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략적으로 키워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성 과기인 양성은 세계 트렌드"라는 안 소장. 여성은 수동적인 지원 대상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략적으로 키워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WISET은 2002년 제정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13년 창립한 기타 공공기관이다. 개소 9년 차인 올해, 더 많은 여성 과기인을 양성하기 위해 어떤 고민과 계획을 안고 있을까.

최근 WISET은 'W-Bridge(W-브릿지)'라는 플랫폼을 열었다. 기존에 미취업·경력단절 여성과기인을 위주로 지원하던 취업포털 'WE두드림'을 초중등, 대학(원), 재직·경력단절, 은퇴 여성과기인 모두의 성장을 지원하는 통합 플랫폼으로 확대 개편했다. 진학, 취업, 성장, 은퇴 후 커리어를 맞춤형으로 돕겠다는 취지다. 가입 시 본인의 연령대, 전공, 취업 상태 등 기본정보를 써넣으면 전 생애주기에 걸쳐 진로탐색, 취업연계, 역량수준 진단, 경력설계 기초컨설팅, 멘토링, 네트워킹 등의 통합 성장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안 소장은 “취임 후 여성의 생애주기를 두고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며 “장기적으로 여성들이 과학기술분야 내에서도 리더로 성장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과학기술을 통해 꿈을 이루고픈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살아있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더했다.

지난달 3월부터 WISET이 운영하기 시작한 W-브릿지 플랫폼. 정부가 해주는 일방적인 지원을 넘어, 직접 교류하는 장을 만들기 위해 
3월부터 WISET이 운영하기 시작한 W-브릿지 플랫폼. 정부가 해주는 일방적인 지원을 넘어, 직접 교류하는 장으로 만든다.

신기술 교육도 시작했다. 안 소장 본인이 젊었을 때 컴퓨터공학을 접했던 것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관점에서다. 빅데이터 전문가 과정, 정보보안 컨설팅 과정, 과학기술과 대중을 연결할 강사 과정 등을 열었다. 지난해는 코로나19로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지역에 제약 없이 강의를 들을 수 있어 반응이 좋았다. 안 소장은 “초중고 및 대학(원) 학생들도 신기술 분야로 진로를 꿈꾸게 하고 싶다”며 “앞으로 다른 신기술 교육과의 차별화 지점을 계속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이 자라날 토양을 다지기 위해 정책 기반 활동도 강화했다. 그는 WISET이 각종 서비스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여성 과기인 관련 정책 발전에 관여해야 한다고 보고 정책연구실을 새로 만들었다. 그동안 성별 다양성에 대한 국제 트렌드를 분석한 연구 등 여성 과기인에 대한 핵심 주제로 5건의 정책연구를 진행했다. 안 소장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 다른 기관과 협력해 정책연구회를 만들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안 소장은 4월 과학의 달을 맞이해 마련한 클럽하우스 토크쇼를 언급했다. 매주 화요일 교수, 기업 대표, 작가 등 과학기술계 여성 연사와 대화하는 자리다. 그는 여성 이슈에 머무르지 않고 수학, 천문학에 대한 생산적인 이야기가 오갔다는 데서  ‘선한 영향력’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그는 “100여명이 참석하는 오디오 토크쇼 자리에서 여성 과학자가 주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뜻깊었다”고 설명했다.

“학계로 유입하는 방식이든 인력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든, 여성 과기인 자체를 늘리는 게 목표"라는 안 소장. 그는 여성들이 정부의 지원대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네트워킹과 멘토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은 1년 임기 동안 그런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게 그의 숙제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