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사회문제들을 남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도전은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혁신가들이다. 아름다운가게, (사)아쇼카 한국, 카카오임팩트는 전폭적이지만 매우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사회혁신가들을 발굴하고 경제적 지원과 연대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사회혁신가들이 바꾸는 세상을 함께 따라가봤다.

50~60년 전만 해도 지진은 남의 일로만 여겨졌다. 태풍으로 강산이 쑥대밭이 된 적도 있었지만 그리 잦은 편은 아니었다. 코로나19도 이웃나라의 일일뿐 나와는 별 상관없이 스쳐 지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재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가까이 있고, 그 빈도는 늘어나고 있다.

20년 넘게 국제 개발과 구호활동을 해온 김동훈 라이프라인코리아 대표는 3년 전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동안 해외에서 갈고닦은 역량을 끌어모아 대한민국의 재난안전시스템을 확 바꿔놓겠다는 것이다.

# 성수동의 한 아파트. 지난해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30가구 86명의 주민들 앞으로 재난대비 키트가 배달됐다. 얼마 후 주민들은 각 가정에서 컴퓨터를 켜고 라이프라인코리아(이하 라라코)가 제작한 아파트 맞춤형 비대면 재난종합훈련에 접속했다. 총 4차시로 구성된 훈련은 응급처치법, 재난대응 요리법, 서바이벌 워크숍, 마음 돌봄 순으로 이어졌다.

 

라라코가 선보인 가족들이 서로 해줄 수 있는 응급처치 시현 장면. 스튜디오에서 강사들이 시범을 보이고 참가자들은 집에서 모니터를 보며 똑같이 따라해본다. 강의는 현실성을 부여해 여성들이 맡았다. 김 대표는 "건장한 성인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는 재난 대응 교육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라라코가 선보인 가족들이 서로 해줄 수 있는 응급처치 시현 장면. 스튜디오에서 강사들이 시범을 보이고 참가자들은 집에서 모니터를 보며 똑같이 따라해본다. 강의는 현실성을 부여해 여성들이 맡았다. 김 대표는 "건장한 성인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는 재난 대응 교육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라이프 해킹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원래는 그 용도가 아닌데 재난시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페트병은 비상시 반으로 잘라 묶으면 부목이 됩니다. 재난으로 전기와 수도가 끊겼다면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야 할까요? 최소한의 재료와 연료로 밥을 해먹어야 합니다. 코로나 블루 같은 우울함은 춤으로 날려보내는 것이 제격입니다. 특히 아프리카 춤이 힐링 효과가 높다고 해요.” – 김동훈 라이프라인코리아 대표

김동훈 대표는 재난안전 교육에 게임적 요소들을 결합하는 ‘재해 상상 게임 (Disaster Imagination Games: DIG) 을 보급해 국내 재난훈련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해 사회혁신가들을 지원하는 카카오임팩트펠로우 2기에 선정된데 이어 올해 초 재난안전분야에서 민관협력을 이끌어냈다는 공로로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심폐소생술 훈련이 최선일까

 

김동훈 라이프라인코리아 대표. 그는 체험형 프로그램 개발로 재난 안전교육의 선택지를 늘리고 컨설팅과 연구 활동을 통해 국가의 재난위기대응 시스템을 바꿔나가고 있다.
김동훈 라이프라인코리아 대표. 그는 체험형 프로그램 개발로 재난 안전교육의 선택지를 늘리고 컨설팅과 연구 활동을 통해 국가의 재난위기대응 시스템을 바꿔나가고 있다.

“국내 재난안전교육은 주로 2시간 내외 강의하고 끝내는 단발성 교육이 많습니다. 그나마 소화기사용법이나 심폐소생술처럼 교육내용이 단순 전달에 그치는 때가 많아요. 기후 위기로 재난의 빈도와 강도는 높아지고 양상은 다양해지고 있는데 재난안전교육은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20년 넘게 재난구호 현장에서 체득하거나 얻은 정보를 토대로 선진국의 재난 훈련 프로그램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변화시키거나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관련 분야에서 숨은 고수 20여 명을 발굴해 협업하고 있다.

라라코는 2018년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와 대한적십자사와 협력해 재난구호소 체험캠프를 진행했다. 대규모 체육관을 빌려 대피소랑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 가족단위로 1박2일 대피 생활을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이다. 구호품도 나눠주고 급식도 하면서 중간중간에 다양한 훈련 내용을 녹여냈다.

2019년 10월. 대전 대양초등학교에서 지역주민 23가구가 참여해 진행된 대덕구 재난구호소 체험캠프 현장. 이 프로그램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코로나19 이후로는 온라인 훈련으로 전환돼 진행되고 있다.
2019년 10월. 대전 대양초등학교에서 지역주민 23가구가 참여해 진행된 대덕구 재난구호소 체험캠프 현장. 이 프로그램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코로나19 이후로는 온라인 훈련으로 전환돼 진행되고 있다.

재난 때마다 검색어 상위에 오르는 ‘생존배낭꾸리기’도 카드놀이 형태로 제작했다. 80장의 카드를 늘어놓고 가상의 시나리오 상황에서 어떤 물건을 배낭 속에 넣을지 열띤 토론을 거쳐 맞춤형 생존 배낭을 꾸려보는 방식이다.

“생존 배낭에 넣을 물건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대부분 물 혹은 비상식량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전국 어디서나 평균 2~3시간 안에 구호품을 받을 수 있어요. 21세기에 정답은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단지 전화를 거는 용도가 아니에요. 비상신호를 보내거나 위치 검색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거든요.” 

지역주민들을 위한 비상 배낭 워크숍. 지역의 재난 상황을 가정하고 대피가 필요한 가상의 가족 멤버를 구성한 후 비상 배낭에 어떤 물건을 담아야 하는 지 우선 순위와 용도를 토론하면서 정해본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비상 배낭 워크숍. 지역의 재난 상황을 가정하고 대피가 필요한 가상의 가족 멤버를 구성한 후 비상 배낭에 어떤 물건을 담아야 하는 지 우선 순위와 용도를 토론하면서 정해본다.

그는 "국가 수준에 따라 재난대응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면서 "물리적 인프라가 잘 구축된 우리나라의 경우 본인에게는 꼭 필요하지만 구호팀이 제때 공급해 줄 수 없는 물건을 우선 순위로 챙겨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고성 산불 때도 할머니 한 분이 집에다 틀니를 빼놓고 오셨어요. 그분은 대피소에서 어떻게 구호식량을 드실 수 있을까요. 현장에서는 남들의 도움을 받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아이들이라면 장난감, 만성질환자의 경우에는 복용하던 약처럼 각자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잘 챙겨가야 합니다.”

 

누가 내 생명줄이 돼줄까

 

김 대표는 전 세계 구호 현장을 돌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바로 공동체가 살아있는 마을이 위기에 강하다는 것.

"만일 집에 불이 났을 때 누가 나를 구해줄까요? 소방관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옆집 사람, 마을사람들이 합심해 구해낸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이를 미담으로 처리해 쉽게 잊힐 뿐이에요. 구호물자를 나눠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진 곳은 영화 속 장면처럼 아귀다툼이 벌어지기 쉬워요. 하지만 공동체가 살아있는 마을에선 아무 직함도 없던 청년들과 엄마, 어르신들이 나서서 줄을 세웁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엔 모스크나 성당, 사찰이 재해가 발생하면 마을회관으로 변신해 구호팀을 맞이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많아야 네댓 명의 외국인들이 말도 안 통하는 마을에 가서 어떻게 수백, 수천 명의 이재민들을 도울 수 있겠어요? 마치 구호단체가 모든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주민들의 역할이 더 큽니다.”

그는 “국내에서도 방재마을 만들기, 안전마을 만들기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주로 소방시설이나 CCTV 설치 같은 인프라 구축의 비중이 높은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사회적 관계망이 촘촘하게 짜여있지 않다면 하드웨어만으론 성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교육이나 인프라보다도 공동체가 살아있는 관계망 구축이 위기 극복에 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대구 재난재해 SOS자원봉사지원시스템의 연합활동. SOS는 대구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결성된 지역사회 1,2,3 섹터가 모두 참여하는 재난대응연합플랫폼으로 시민참여 기반 재난대응 시스템의 대표적 사례다. 
대구 재난재해 SOS자원봉사지원시스템의 연합활동. SOS는 대구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결성된 지역사회 1,2,3 섹터가 모두 참여하는 재난대응연합플랫폼으로 시민참여 기반 재난대응 시스템의 대표적 사례다. 

 

재난사회복지 도입 시급

 

김 대표는 “코로나19가 국가재난대응 시스템을 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면서 “국내에도 이제 재난사회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는 사회복지분야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팬데믹으로 노인복지관이 문을 닫게 되자 경로식당이 문을 닫았고 거기서 식사를 하던 분들이 결식 상태가 됐죠. 혹시 공적 마스크를 약국에서 팔 때 긴 줄 행렬에서 휠체어 타신 분을 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보기 힘든 장면이었을 텐데 그럼 이분들은 누군가 따로 잘 보호하고 계셨던 걸까요? 우리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 많은 인명을 구호하기 위해 집단적이고 표준적인 구호활동을 폅니다. 하지만 재난 약자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 필요한 것이 다를 수 있어 좀 더 세분화된 대응이 필요합니다. 선진국에선 재난 약자들이 처한 틈새를 메꾸는데 민간영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재난안전 실증실험 모습. 노인들이 실제 상황에서 대피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체험해보기 위해 건강한 청년들이 거동을 불편하게 하는 장비를 착용한 상태로 걷고 있다.
일본의 재난안전 실증실험 모습. 노인들이 실제 상황에서 대피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체험해보기 위해 건강한 청년들이 거동을 불편하게 하는 장비를 착용한 상태로 걷고 있다.

그는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재난 약자들을 위한 대피소가 따로 설치되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마을단위로 노인이 있는 집을 대상으로 일이 터지면 누가 어르신을 돌봐줄 것인가라는 대피계획서를 수립해 재난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라고 전했다.

선진국에선 '재난 약자들이 안전할 수 있다면 시민 모두가 안전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재난대응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적십자사, 자율방재단 등 민간의 자원봉사활동이 지금보다 훨씬 고도화돼야 합니다. 밥차를 운영하고 구호품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을 면밀히 관찰해 틈새를 메워가야 합니다. 정부는 인프라 구축을 공고히 하고 민간영역이 제 역할을 잘 해낼수 있도록 진흥책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그는 지난해 서울시복지재단의 의뢰를 받아 국내 최초로 사회복지사들을 위한 23개의 재난 사회복지교육훈련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올해에는 시범교육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2020년에는 정책제안활동에 참여해 광역시 도의 자원봉사센터에 정부 지원의 재난코디네이터들이 배치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비영리 한계... 사회적기업으로 돌파

 

라이프라인코리아는 사회적기업이다. 라이프라인이란 전력, 수도, 통신처럼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생명선이다. 김대표는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복지의 최저선을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20년 넘게 24개국을 드나들며 비영리 활동만 해온 그가 3년 전 사회적기업가로 옷을 갈아입은 이유는 뭘까.

한계를 넘고 싶었어요. 규모가 작은 비영리단체가 국제 개발에서 큰 임팩트를 창출하려면 좋은 프로그램 개발이 관건입니다. 하지만 비영리 공모사업에선 개발비 지원 항목이 없어요. 사회적기업은 개발비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장 반응을 봐가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거든요. 또 기업이라는 특성 때문에 고객의 반응과 수요에 즉각 대응해서 끊임없이 변화해야만 한다는 점도 매력 포인트입니다.”

사회복지시설 종사자들을 위한 응급 대응 실습 장면. 시설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용자나 동료들이 겪는 부상 등 다양한 응급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들을 직접 체득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사회복지시설 종사자들을 위한 응급 대응 실습 장면. 시설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용자나 동료들이 겪는 부상 등 다양한 응급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들을 직접 체득해보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수요자들이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고를 수 있도록 체감형 콘텐츠를 계속 늘려간다는 방침이다.

“국민들 가운데 100만 명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춰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많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봐야 국민 50명 중 1명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버스 안, 지하철 한 칸, 교실 한 곳 등 50명쯤 있을 공간에서 1명이라도 바르게 판단하고 소리칠 수 있다면 다 살수 있어요. 재난 대응을 위한 시민리더 100만 명 양성 꼭 필요한 일 아닌가요?”

사진제공= 라이프라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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