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숙의 화톳불 옆 소소담담] 3. 배우를 꿈꾸던 남자
[윤명숙의 화톳불 옆 소소담담] 3. 배우를 꿈꾸던 남자
  • 이로운넷=윤명숙 시니어 작가
  • 승인 2019.11.04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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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나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인생사가 쓸쓸해지고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1958년이 저무는 마지막 달에 결혼했다. 그리고 좀 지나자 장마 후 불쑥 솟아나는 버섯처럼 남편의 형제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얼굴을 내밀었다. 형제가 몇이나 되는지 건성으로 듣고 시집온 나는 모든 걸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달라질 게 없는 살림이었으니 동생이 셋이든 넷이든 건사할 능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막내 시동생은 내 남동생과 같은 1948년에 출생한, 세 살 무렵 6.25 전쟁을 겪은 세대다. 시아버지께서 전쟁 중에 돌아가셨으니 홀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지냈으려니 짐작은 했다. 그러나 막내 시동생이 갑자기 배우가 되겠다고 안성에서 보따리 싸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나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고 졸업장도 없는 데다 배우가 되기에는 얼굴이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같으면야 성격배우로 성공할 기회라도 주어졌겠지만, 그 시절은 무엇보다 얼굴이 잘생겨야 배우 자격이 있던 때였다.

그 당시 우리는 신촌 쌍 우물가에 방 세 개 딸린 무허가 집에서 살았다. 그중 방 하나를 세 주어 집주인 행세를 하던 때인데, 별수 없이 세입자를 내보내고 시동생 둘을 불러들였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얼마나 함께 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막내 시동생이 연기 연습한다고 횃대에 걸어놓은 옷자락을 부둥켜안고 연극 대사를 청승맞게 읊조리던 장면만큼은 또렷이 떠오른다.

막내 시동생은 유난히 눈이 작고 코가 납작했다. 키라도 좀 크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야속하게 받쳐주지 않았다. 요즘은 너도나도 돈만 있으면 하는 성형수술이지만 그때는 아무나 엄두 낼 수가 없었다. 전문 성형의도 별로 없었고 일반인들은 관심도 두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배우가 꿈인 시동생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없는 돈을 짜내서 눈과 코 성형수술을 겁 없이 감행했다. 명동의 이름난 병원에서 했다는데 어찌 된 셈인지 눈두덩은 더 수북해지고 납작코는 주먹코로 바뀌었을 뿐, 시간이 지나도 기대했던 오뚝한 코로 바뀔 기미가 안 보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머리를 옆으로 돌려 자면 코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는 것이다. 시동생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코를 차게 한 후 손으로 주물러서 제자리로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고, 몇 달이 지나도 콧속에 들어앉은 그놈의 파라핀은 말썽을 부렸다. 언감생심 당치도 않은 미남 배우의 꿈이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 연극을 좀 해본 사람이라 배우의 자질이 잘생긴 외모와 무관하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시동생 말을 콧등으로 들을 때 그래도 나는 기대를 했었다. 왜냐하면 끼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심한 열등감까지 있어 편히 대하기 쉽지 않은 데다 갈수록 천덕꾸러기로 되어가는 꼴을 내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시동생 처지가 동갑내기 내 남동생과  비교되어 더욱더 안쓰러웠던 것도 같다. 천진하고 귀여웠던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더 아쉬웠다.

1961년, 남편이 청년작가 미술전에 참가 차 파리에 갔다가 일정이 연기되는 바람에 일 년 가까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다. 사활을 거는 심정으로 유일한 재산인 집 보증금을 뽑아 떠났는데, 석 달 예정한 것이 그만 일 년이 걸렸다. 공무원의 태만으로 미술전이 일 년 연기된 사실을 전달받지 못 했던 것. 오도 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 건 남편뿐 만 아니라 청주 친정집에 내려간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배가 만삭이었다. 내 등을 떠미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해산일이 다가오자 난 돌 지난 아들을 데리고 안성 시집을 찾아갔다. 막내 시동생은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들로 산으로 쫓아다니기 바쁜 개구쟁이 소년이 막 돌 지난 어린 조카를 만난 것이다. 섬약하고 다감한 성품의 삼촌은 엄마와 떨어져 보채는 조카를 둘러업고 놀러 다니기 바빴다. 선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여름 삼복더위에  어린 조카가 잠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아이 곁에 없었다. 아들은 시집에 맡겨놓고 우윳값이라도 벌기 위해 서울에 가 있었다. 언니 집에 기거하며 남편 친구의 소개로 국제복장학원에서 스타일화 그리는 일을 했다. 다행히 그 일을 두 달 정도 하고는 안성에서 아들을 데려올 수 있었는데, 그사이 엄마를 잊고 서먹해진 아들은 하룻밤 자고 나더니 잠결에 그랬는지 이불을 박차고 삼촌을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린것이 엄마와 삼촌을 통해 두 번이나 헤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안성을 떠나올 때 막냇삼촌이 눈에 안 보였던 것도 아마 어린 조카를  떠나보내기 싫어 어딘가에 숨어서 울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가 열세 살 소년이던 때의 일이다.

셋째 시동생 결혼식 가족사진.
셋째 시동생 결혼식 가족사진.

시동생은 한동안 배우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셋째 형의 자취방에 얹혀살던 막내는 형이 장가를 가는 바람에 배우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오갈 데 없던 막내 시동생은 어쩔 수 없이 군에 입대했고,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은 드디어 그가 올바른 사람이 될 기회가 왔다며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시동생이 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나왔을 때 우린 그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특수부대에 있다고 강조했지만 군 조직을 모르는 가족들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시동생이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리석게도 우린 대한민국 군인이 위험한 전쟁 지역으로 내몰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동생이 월남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후방에서 보급품 정리나 할 거라는 근거 없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그렇게 믿게 하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월남 파병 자료 사진.
월남 파병 자료 사진.

시동생이 전장에서 돌아와 풀어놓은 보따리에는 봉급을 모아 사 왔다는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그 외에도 외제 물건이 다수 있었는데, 몽땅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팔아 목돈을 만들어서 나에게 맡겼다. 시동생은 군인이 되기 전이나 후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말수가 줄었고, 특히 월남에서의 일을 떠벌이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남은 휴가 동안 시골에 내려가서 어머니도 뵙고 친척도 만나는 등 바쁘게 돌아다닌 후 시동생은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틀쯤 지난 후에 군인 한 명이 집으로 찾아와서 시동생을 찾았다. 우린 전후 사정을 듣기도 전에 가슴부터 철렁했다. 남편은 젊어서 한때 국민병 문제로 헌병과 경찰을 피해 다닌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복 군인을 보기만 하면 얼굴색부터 변한다. 그러나 군인이 찾아온 이유는 남편이 아닌 시동생 때문이었다. 시동생이 부대에 귀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부대원 왈, 시동생을 도망병으로 간주하고 헌병대로 이첩하면 그만이지만 그동안 월남에서 고생한 것을 참작해 비공식적으로 그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3일 말미를 줄 테니 동생을 찾아 설득해서 귀대시키라는 당부를 하고 그는 돌아갔다.

그날 밤 시동생이 살그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형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자기는 더는 군 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죽는 것과 불명예제대 하는 것! 어쩌겠는가. 불명예제대라도 해서 목숨을 부지하라고 권할 수밖에. 돌이켜 보면 그날 밤,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 셈이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동생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닥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수순대로 시동생은  도망병이 되고, 제 발로 걸어가 자수를 하고, 곧바로 영창에 수감됐다.

몇 달 후 나는 안양 교도소로 면회를 갔다. 혼자 갈 용기가 없어 동네 친구를 대동해 찾아간 면회실은 작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구조였다. 영화에서 보아 익히 아는 데도 낯설고, 긴장됐다. 시동생의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박박 민 머리통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난 할 말을 잊었다. 시동생이 나를 보자 눈을 치떴다 내리떴다 이리저리 굴리며 손을 수화하듯 바쁘게 움직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교도관을 눈짓하면서 내 말을 막는 것이었다. 교도관의 손에 끌려나가면서도 계속 사인을 보냈는데 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면회를 다녀온 뒤, 함께 갔던 친구의 남편에게서 들은 말이 더욱 심란했다. 도망병들은 각목으로 죽을 때까지 팬다는 것이 특히 더 무서웠다. 그냥 방치하면 시동생은 죽을 목숨이었다.

마침 친구 남편이 오랜 군 생활을 한 덕에 그쪽으로 인맥이 넓었다. 그의 도움으로 시동생을 안양교도소에서 일반 감옥으로 옮길 수 있었다. 다행히 6개월 만에 풀려 나왔고, 몸이 회복되기까지 내 집에서 지냈다. 인정 많은 내 친정엄마는 사돈총각을 몹시 안타까워했고,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었던지 당신이 운영하는 문방구로 시동생을 데리고 갔다. 사돈총각이 기억력이 뛰어나고 셈도 빠른 데다 뭣보다 싹싹하고 부지런하다면서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러나 겨우 일주일을 못 넘기고 그 일도 끝이 났다. 갑자기 드러난 시동생의 이상행동에 심약한 내 어머니가 질겁을 한 것이다. 월남전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안양 교도소에서 받은 폭력이 더해져 정신병이 발현되는 것 같았다.

파월장병 환송 국민대회 자료 사진.
파월장병 환송 국민대회 자료 사진.

어쩔 수 없이 막내 시동생은 집 떠난 지 5년 만에 다시 어머니 곁으로 되돌아왔다. 어머니는 종종 서울에 올라오셔서 막내의 근황을 들려주셨는데, 내 어쭙잖은 의학상식으로 보자면 시동생의 증상은 정신 분열에 가까웠다. 그나마 매사 긍정적인 시어머니의 그늘이었기에 시동생이 결혼도 하고 2남 1녀의 자식도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장례식장에서 본 시동생의 아이들은 씩씩하고 예쁜 성인으로 자라 있었다. 피아노를 잘 친다던 조카딸은 시동생의 소원대로 콧날이 오뚝하고 이마가 반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형제들이 놀랍고 신기했던지 장례를 치르고 그 애들이 내 집에 우르르 놀러왔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행동을 몹시 증오했는데 저희는 몰랐던 아버지의  감춰진 사연을 내게서 듣고 난 큰아이가 서럽게 울었다. 나도 조카에게서 몰랐던 얘기를 들었다.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헛소리만 하던 아버지가 일 년 가까이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모두 무심했는데 연고 없는 어느 시골 지서에서 사망 소식을 보내왔단다.

가족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형제들의 보살핌도 없이 평생 외로움 속에서 홀로 죽어간 시동생의 영혼을 기리며  늦게나마 사랑을 보낸다.  ‘막내 서방님! 좀만 기다리슈, 곧 만날 테니, 못다 한 얘기 그때 해 봅시다.’

윤명숙_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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