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는 한때 동갑내기 여자 친구가 있었다. 모 화랑 사장인 J였다. 화가와 화랑은 공생 관계인 데다 그녀와는 31년생이라는 공감대까지 끈끈하게 깔려있어 꽤 돈독한 사이였다. J는 사교성이 남달랐다. 언제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런 친구를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이없게 잃고 말았다.2001년 당시 우리는 줄곧 단독주택에서만 살다가 아이들이 분가한 뒤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한 터였다. 한강 변에 위치해 베란다 창문을 열면 눈앞에 강이 펼쳐지고 강물 위에 둥실 떠 있
나는 영어를 못 한다. 아주 간단한 생활영어도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들 공부할 때 땡땡이를 쳤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자랑거리냐고 핀잔을 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놈의 열등감이 학창 시절의 나를 얼마나 암울하게 했는지 이번 기회에 밝히고 싶다.내가 처음 알파벳과 만난 것은 청주여자중학교로 전학 간 첫 시간에서다. 우리 가족은 6.25 전쟁으로 경남 진해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환도하던 중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청주에 멈춰서 임시로 짐을 풀었다. 이화여중에 합격해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서울집으로 돌아갈 날
둘째 아들 내외와 우린 한 건물에 산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이 마주하고 있다. 중정이라야 사방 9m쯤 되는 콘크리트 바닥에 소나무를 심기 위해 거북이 등처럼 흙을 메운 것이지만 말이다. 이 새집으로 이사 올 때 며느리와 약속했던, 아침저녁 창 너머로 눈인사하는 것은 창문에 선팅을 짙게 하는 바람에 물 건너갔다. 맘만 먹으면 문 열고 소리쳐도 되는 거리지만, 성격 급한 며느리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우리 집에 드나든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매니저이자 집사 겸 도우미로, 하는 일이 많다.품격을 지키려면 며느리 이름을 함부로
나는 어려서 밤중에 뒷간 가는 것 말고는 딱히 무서움을 타는 게 없는 아이였다. 자라는 내내 추리소설이나 공포 영화를 즐겨 보았고, 실제에서도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별거 아닌 일로 잘 놀랜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익숙하지 않은 환경 때문일 거라고 이해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빈번해지니 납득이 안 된다. 왜 늦은 나이에 내게 놀랄 일이 일어나는가? 왜 갑자기 헛것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는가?하루는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방문을 열었다가 기절할 뻔했다. 희뿌연 어둠 속에서 중절모를 쓴 시커먼 사람이
우리 부부는 1958년에 결혼해서 61년을 함께 살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남편과 떨어져 지낸 것은 고작 2년이 채 안 된다. 결혼 초 남편이 파리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나 혼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11개월을 버틴 것과 노년에 내가 집을 박차고 나가 6개월을 따로 산 것 외에는 줄곧 붙어살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허둥지둥 사느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올해 들어 문득 아직도 우리 둘이 같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편 먼저 보내고 혼자된 친구들도 많고, 병들어 아내 구실 못하는 또래도 수두룩하다. 그
엊그제 종로 5가에 위치한 효제초등학교를 다녀왔다. 6·25전쟁이 나기 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다. 종종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가지는 않았었다. 무슨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 어린 시절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아 선뜻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나는 원효로에서 남정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청량리로 이사하면서 종로 5가에 효제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이듬해 여름 전쟁이 나는 바람에 졸업도 못 하고 피난을 가야 했다. 전쟁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2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때문인지 그 시기의 기
전화를 받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나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인생사가 쓸쓸해지고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1958년이 저무는 마지막 달에 결혼했다. 그리고 좀 지나자 장마 후 불쑥 솟아나는 버섯처럼 남편의 형제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얼굴을 내밀었다. 형제가 몇이나 되는지 건성으로 듣고 시집온 나는 모든 걸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달라질 게 없는 살림이었으니 동생이 셋이든 넷이든 건사할 능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막내 시동생은 내 남동생과 같은 1948년에 출생한, 세 살 무렵 6.25 전쟁을 겪은
나에게는 다섯 명의 여자 형제가 있다. 언니는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에 결혼해서 집을 떠났고, 여동생 셋은 피난살이하던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둘째였던 내가 그때부터 맏이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얘기다.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태어난 셋째는 살결이 유난히 희고, 통통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날이 무거워지는 동생을 끌어안고 집 근처 무심천 둑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저녁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아기를 돌봤다. 우리 모두 뜨내기 피난살이에 익숙했고 웬만큼 불편한 것은 고생으로 치부하지도 않았다.여섯 식구에게
모처럼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다녀왔다.심리치료를 전공한 딸은 그동안 꾸준히 제 전문 분야의 책을 써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색다른 책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삼복더위에 내가 광화문까지 행차한 것도 딸의 책이 서점에서 제대로 홍보되고 있는지 상황을 살피러 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딱 한 권만 에세이 부스에 꽂혀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적들 사이에 단 한 권이라니.요즘 사람들은 예전처럼 책을 사서 읽지 않는다. 출판업계는 어려워도 책 출간은 쉬워져서 하루에도 수십 또는 수백 권의 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