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의 일상다반사] 5. 겨울이 오고 있다
[박승호의 일상다반사] 5. 겨울이 오고 있다
  • 박승호
  • 승인 2018.12.03 0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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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온통 첫눈에 관한 소식이다. 아, 첫눈. 첫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모두가 하나씩 가진 터라 나도 잠시 기억을 추슬러 본다. 하지만 정말 잠시였다. 꿈속에 머문 나와 달리 아내는 현실적이다. 창밖으로 내리는 무거운 눈발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탈탈 털며 나가자고 재촉한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You know nothing, John Snow.”

지난 겨울까지만 해도 나는 아파트에 살았다. 결혼 후부터 줄곧 공동관리주택에 살았으니 근 30년간 내게 집은 그저 관리비만 내면 모든 책무가 관리사무소로 이전되는 편한 삶이었다. 부모를 모신다며 눈뜨면 얼굴을 마주하는 집을 지어 단독주택 생활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불편함이 따랐다. 하지만 시스템화가 가능한 불편함이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반복되는 문제에 대해 해결 프로토콜을 설계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패턴이 없다. 때 이른 눈이었고, 서릿발만 날리던 예년의 첫눈과 달리 폭설에 가까웠다. 물론 준비는 하고 있었다. 차량의 타이어를 겨울 타이어로 교체했고, 동파를 막으려 노출된 수도 파이프에 보온재를 감았다. 이런 이른 겨울 준비에도 불구하고 첫눈은 재앙에 가깝게 갑작스레 다가왔다.

우리 집은 언덕으로 오르는 골목 어귀에 있다. 경사가 은근히 가파르다. 주택가라서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들이 늘어서 있고, 생각보다 유동인구가 많다. 아내에게 등 떠밀려 밖으로 나섰을 때는 이미 신발이 파묻힐 정도로 눈이 쌓여있었다. 이웃 두어 명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저 너머 대로에는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고, 그중에는 길 한편에 버려진 차량도 보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토요일 아침이었다. 일하러 나가는 사람보다는 집에서 쉬는 사람이 많았을 게다. 그런데도 이 밀도 높은 지역에 자기 집 앞길을 치우러 나온 사람은 고작 네 명뿐이었다. 제설용 염화칼슘도 준비하지 못했고, 넉가래도 없었다. 빗자루는 소용이 없었다. 강아지풀로 가려운 등을 긁는 격이었다. 아내와 난 쓰레받기를 들고 허리 굽혀 쌓인 눈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무척 고됐다. 눈은 그렇게 두 시간여를 더 내렸다. 전선과 가로수에 쌓였던 눈이 후드득 등으로 떨어지면 억 소리가 났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눈이었다. 그사이 새로운 이웃 한 명이 나타나 제집 앞을 쓸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청년 때까지 30여 년을 단독주택에서 살다 보니 제집 앞 눈은 제가 치워야 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이후 25년을 아파트에 살았고, 30년간 체득한 의무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관리비가 모든 의무를 대신했다. 내가 해왔던 많은 일이 관리인들의 몫이 되었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의무 전가였다. 올봄에 다시 단독주택 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 첫눈은 우리 가족에게 내려진 주체적 시민 의무에 관한 첫 번째 시험대였다. 다섯 가족 중 연로한 부모님 두 분을 빼고 아내와 나, 뒤늦게 뛰어든 아들까지 온 가족이 출동했다.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지켜보던 한 주민이 심드렁하게 ‘구청에 전화해서 염화칼슘 가져오라 했으니 눈 치울 필요 없어요’라고 소리쳤다. ‘아니 언제 올 줄 알고요’라는 말이 목젖까지 튀어나오는데 아내가 ‘네’하고 대답하며 아무 말 말라는 눈치다.

우리 집은 세 개의 다세대주택에 둘러싸여 있다. 관리인이 따로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은 탓에 그 집 앞까지 치우느라 고생 좀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만했다.

오래된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는데 거의 2년이 걸렸다. 소음과 먼지, 통행에 큰 불편을 끼쳤다. 이웃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뒷집 다세대주택의 주인은 할머니시다. 늘 퉁명스러웠는데 아마도 2년이나 시달린 탓일 것이다. 이날 언덕 눈길에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시길래 달려가 큰길까지 모셔드렸다. 깨끗이 치워놓은 그 집 골목길을 거쳐 내려왔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태도에 이전과 다른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긴 시간에 걸친 노여움이 한순간에 사라진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올겨울도 눈이 많이 내릴 거란다. 교통이 마비되고 사고가 잦을 거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재난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웃일지도 모르겠다. Winter is coming. 겨울이 오고 있다.

추신 : 나만 몰랐던 것 같은데, 사실 내 집 앞의 눈 치우기는 의무사항이다. 2006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자연재해대책법 제 27조에 의하면, ‘건축물의 소유자(점유자) 또는 관리자로서 그 건축물에 대한 관리 책임이 있는 자(이하 "건축물관리자"라 한다.)는 관리하는 건축물 주변의 보도, 이면도로 및 보행자 전용도로에 대한 제설, 제빙 작업을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벌금을 부과하는 미국과 달리 국내법은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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