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아트베이스 '기지'에서 만난 박승호 이화여대 전 교수.

“‘이화여대에 있습니다’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었던 과거와는 단절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하든 주절주절 설명이 따라야 한다.”

지난 6월 퇴직을 앞둔 박승호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가 쓴 글을 읽고, ‘설명이 필요한 삶’에 대해 생각해봤다. 소속이나 간판이 유독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직업’이란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수식어다. “자기소개의 프리패스 같은 교수라는 직업”을 정년이 한참 남은 때 스스로 내려놓은 박승호 전(前) 교수(55)의 사연이 궁금했다.

학교를 떠난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서울 연희동에 자리한 ‘기지(GIZI)’였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기지에 놀러 오세요”라는 답변이 왔다. 조용한 동네, 한 골목에 들어서니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의 독특한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Art Base GIZI’라고 적힌 그곳은 박 전 교수의 자택이자 작업실, 그가 새롭게 시작한 재단법인 ‘기지’의 활동 공간이기도 했다.

'기지' 3층에 자리한 박 전 교수 자택의 내부 모습. 수많은 책들과 피규어 등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 8월 완공된 기지의 1~2층은 박 전 교수의 아버지인 박서보 화백의 갤러리 겸 작업공간이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박 화백의 그림 수십 점과 돌과 나무, 미술품으로 꾸려진 정원을 둘러보니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3층 박 전 교수의 자택 안으로 가보니 이번에는 입까지 벌어졌다. 도서관처럼 빼곡히 꽂힌 수백 권의 책들과 각종 피규어와 인형, 카메라, 장식품 등을 구경하느라 고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융합콘텐츠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을 가르치던 박 전 교수와 어쩐지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책과 아기자기한 소품, 각종 전자기기와 장비들, 동그랗게 웅크려 앉은 고양이까지. 낯선 듯 익숙하고, 어긋난 듯 조화로운 그곳에서 음악을 듣고 과일을 먹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6월 21일, 18년간 일한 이화여대를 떠났습니다. 조기퇴직에 '성공'한 소감이 어떤가요?

박 전 교수는 지난 20년간 학교에 있으면서 가장 뿌듯한 일을 묻는 말에 "제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릴 때"라고 답했다. 가끔 부부 동반으로 '기지'에 놀러와 신나게 웃고 떠들고 가는 일이 아주 즐겁다고 했다.

▶ 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퇴직 전 1년간 건강상 이유로 휴직했던 터라 이미 오래전에 퇴직한 느낌이 들어요. 특별히 경험해보지 못한 한가함이나 시간의 여유로움 같은 거로 새삼스레 감동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웃음) 교직이 아무래도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잖아요. 두 번의 방학이 재충전할 여유도 주고요. 크게 달라진 점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얼마 전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계산을 하려는데, ‘오류’가 뜨는 거예요. 직장 의료보험이 말소되고, 지역 의료보험으로 이전되는 행정처리가 늦어지면서 공백이 생긴 모양이더라고요. 평소 약값의 5배 정도를 지불했는데,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딱 그 순간 비로소 내게 직장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 시간을 거슬러 교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요?

▶아버지와 형이 교수여서 가족들 모두 제가 당연히 대학에 가기를 원하셨어요. 근데 저는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괜한 어깃장이었을 거예요. 만약 직장생활을 바라셨다면, 오히려 저는 대학에 자리 잡으려 뛰어다녔을 거예요.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후배가 운영하는 벤처기업으로 도망쳐 2년간 직장생활을 했어요. 그 기간 강의 요청을 꽤 받았는데 서울대, 이화여대, 한예종 딱 세 군데만 나갔습니다. 한 주에 1~2번 나가는 강사 생활이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그러던 중 이화의 부름을 받았는데 신기하게 지금까지 견지하던 태도는 오간 데 없고, 순간의 고민도 없이 학교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관둘 수 있고, 오래 일할 생각도 별로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전임 강사부터 시작했는데 ‘조교수가 되면 관둘 거야’라고 하다가 어느새 부교수가 되고, 또 정교수가 돼 정년까지 보장받게 됐습니다. 약 10년 동안 ‘관둔다, 관둔다’고 버릇처럼 말해왔던 터라, 나중에는 ‘양치기 소년’이 돼서 사람들도 더는 제 말을 믿지 않더라고요.(웃음)

- 확실히 ‘학교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 구체적 계기가 있었나요?

박 교수는 '학교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로 '이대 시위'를 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평등한 모든 시민이 합리적인 사고와 공정한 방식으로 주체가 되는 사회를 꿈꾸게 됐다"고 이야기했다./사진제공=박승호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껴 조기퇴직을 결정한 것이 5년 전 일이에요. 2016년 이화여대에서는 미래 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총장 퇴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는데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몰고 온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었어요. 당시 총장 해임을 촉구하는 서명에 동참한 교수가 전체 인원의 1/6에도 못 미쳤고, 10월 교수 시위에는 참석한 사람은 100명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후 총장은 사퇴했지만 힘 가진 자에게 줄 서고, 남의 공을 제 공으로 둔갑시키고,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자주 목격하면서 염증을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연구실에 더는 신입생을 뽑지 않았고, 외부 연구 용역들도 정리해 나갔습니다. 연구실 학생들이 매 학기 몇 명씩 졸업했지만, 아직 3명이 남아서 논문지도는 다음 학기까지 이어갈 예정입니다.

- 교수는 정년이 길고 노후가 보장되는 직업입니다. 퇴직을 결정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퇴직을 결심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설득하고 주변의 이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죠. 어머니는 늘 하시던 대로 제 선택을 믿어주셨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좋은 직장을 왜 관두느냐’며 못마땅해 하셨죠. 퇴직을 결심하고 퇴직하는 날까지 무려 5년이나 ‘네 선택에 난 반댈세!’라는 반응이었어요. 다른 화제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불쑥, 뜬금없이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셨어요.(웃음)

아내는 관두더라도 좀 더 다니다가 그만두기를 원했어요. 고정수입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겁니다. 저라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65세에 명예롭게 퇴직하고, 다음날부터 골방 노인네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년 이후의 삶을 생각해보니, 그때 무언가를 새롭게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뭔가를 하려면 조금이라도 젊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세상이 넓어지더라고요. 특히 학교 시위 과정을 겪으면서 그동안 퇴화한 감각이 깨어났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에게 가혹한 진실을 알려줄 때, 갑자기 감각이 쫘악 확장하는 그런 느낌 같은 거였어요. 

- 퇴직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인지?’라고 했는데요. 저도 한 번 묻겠습니다.

박 전 교수는 문화예술 재단법인 '기지'를 통해 청년 예술가를 지원하고, 일반인 예술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그는 "수혜 범주를 점점 넓혀서 '청년 지원 사업' '일반인 교육 사업'으로 확대해가고 싶다"고 말했다.

▶오래 전에는 오토바이 튜닝 워크숍을 만들고 싶었어요. 한적한 제주도로 낙향해 적게 벌고 적게 먹으며 흥미로운 일들을 하다가 삶을 마감해도 좋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시위 과정을 통해 각성하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눈이 떠졌어요. 불공정한 세상, 불평등한 젠더 문제, 쇠락한 정치의식, 지구환경과 동물권 등을 생각하면서 바꾸기 힘든 사회적?구조적 문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말로만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고, 행동에는 비용이 필요하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재원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재단법인 문화예술 ‘기지’입니다. 구체적으로 구상한 건 4년 전쯤인데요. 부모님이 연로해지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곁에서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집 살림을 정리해 연희동에 한 집을 차린 것이 ‘기지’의 시작이죠. 최근 같은 이름의 법인을 설립한 건 청년 예술가를 발굴 및 지원하고, 일반인에게 예술 교육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의미 있는 일을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잖아요. 예술가 지원이나 교육 사업은 최대의 목표 사업이지만, 결정적 지출 항목이어서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그래도 사회를 바꿔 나가려면 같은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저변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 녹색당 당원으로서 활동이나 집필 계획 등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그동안은 1년에 한 번 지구당 총회에 참석하거나, 집회에 얼굴을 비추는 정도의 활동을 했는데요. 지난해 녹색당 신지예 씨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고, 고은영 씨가 제주지사 후보에 나섰을 때 정치후원금을 보내는 등 참여의 폭을 넓혔습니다. 최근에는 당내 동물권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데요. 반려 고양이 ‘뮤’와 ‘포’를 키우면서 동물권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년 전 먼저 떠난 뮤가 저에게 가르쳐준 것이 오직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사랑이었고, 지금은 그 사랑을 온전히 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 1년 전 출판 계약한 ‘아무튼 시리즈’의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원래는 ‘아무튼 집사’로 하기로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소재가 바뀌어 ‘아무튼 애플’로 쓰게 됐는데요. 애플 매킨토시 시리즈가 발표되고 국내에 정식 수입되면서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일찍 구매한 경험부터, 35년간 애플의 대부분 제품을 경험하며 생긴 개인적 일화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써나갑니다. 제품 리뷰나 애플 상찬의 책은 아니에요. 올해 안에는 출간되도록 달려볼 생각입니다.

초록빛 눈이 매력적인 고양이 포. 박 전 교수는 포에 대해 "생각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존재"라고 말했다./사진제공=박승호

교수를 그만둔 지금, 이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 명함을 만들 만한 직함이 없어서 그냥 ‘백수’라고 소개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놀리는 줄 안다”며 웃었다. 

“한편에서는 마지막 직업의 직책이 평생을 가는 거라면서 그냥 ‘교수님~’ 하며 부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학교에 있을 때도 교수로 불리는 걸 싫어했는데, 교수도 아닌 때에 교수라 불리니 불편하더라고요. 학생들은 저를 늘 ‘쌔앰~’하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교육자가 아닌 일반명사의 ‘선생’ 정도로 불리면 부담 없을 것 같아요.”

사진. 전석병 작가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