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의 일상다반사] 8.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
[박승호의 일상다반사] 8.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
  • 박승호
  • 승인 2019.03.04 02: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꽃샘추위가 있다 하더라도 3월의 시작이면 봄이 왔다고 봐야겠죠. 봄을 시샘하는 찬 바람이 얼마간 불겠고 한두 번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봄은 올 것이며 여름이 뒤따를 겁니다. 저도 이런저런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모터사이클의 오랜 먼지도 털고 시동도 걸어줍니다. 방전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녀석에게는 CPR을 실시합니다. 겨우 숨이 살아나고 엔진의 작은 고동이 느껴집니다. 봄 아지랑이 사이사이를 누비며 달릴 꿈을 꿉니다.

인생을 곧잘 계절에 비유하곤 합니다. 봄은 싹이 트고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는 소년기입니다. 여름은 뜨거운 햇살 아래 만물이 성장하는 청년기겠고요. 가을이 땀과 열정의 결실을 수확하는 장년기라 한다면, 하나 남은 겨울은 아무래도 살아온 길을 더듬고 성찰하는 노년기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뭐 이것도 계절 변화가 뚜렷한 나라에서나 체감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적도나 극지방에 가까운 사람들은 조금 억울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비유에 따르면 저는 늦가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순조롭게 정년을 맞이하는 것을 전제로 정년 이후를 고민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이게 억울한 겁니다. 대학에 들어와 20년 가까이 근무하며 매년 반복되는 삶을 살았는데, 단지 안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년까지 10년을 더 반복하는 삶이란 과연 행복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모든 직장인이 패턴 속에 살아간다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그렇습니다. 어디 직장인뿐이겠습니까. 반복되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지요.

마음으로는 이해하는데도 가슴이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기퇴직을 준비해왔고 이번 학기를 끝으로 학교를 떠납니다. 새로운 일들을 준비하지만 아직은 막연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유학 시절이 떠오릅니다. 커다란 이삿짐 가방 두 개를 끌고 나리타 국제공항 입국장을 나서는 자동문이 열릴 때의 막연함 같은 기억들 말입니다. 구청에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고,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일, 학생증을 만들어 지하철 통근권을 발급받는 일 등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때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 할 때였으니까요. 손짓·발짓 다해가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던 기억에서 앞으로의 제 모습을 읽어냅니다.

무얼 하여도 새로울 겁니다. 모든 게 처음일 테니까요. 서재에 욕심부려 쌓아놓은 읽을거리들처럼 해보고 싶은 것들도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고 수시로 우선순위를 바꿔가며 마음을 빼앗습니다. 어제는 저게 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이게 하고 싶고 내일은 또 바뀔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들이 뒤섞여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지금 당장 손에 잡은 것이 있습니다. 연필입니다. 조금 생뚱맞죠.

제게 콤플렉스가 하나 있는데요. 미대를 나왔는데 그림을 못 그립니다. 자로 잰듯한 설계는 잘하는데, 사람이나 동물을 편히 그려내지 못합니다. 구도도 못 잡고 선이 늘 긴장한 탓에 편안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게 사람을 더 주눅 들게 하죠. 그런 제게 컴퓨터 그래픽은 일종의 해방구였지만, 동시에 나락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연필을 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봄이 다시 찾아왔고,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들 중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마침 신간으로 주문한 <동물을 쉽게 그려보자> (글/그림 권지애, 책밥)이 책상 위에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놓여있었고요. 아귀가 잘 맞아들어가는 것 같아 책에서 일러주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일 사랑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가족. 아내와 아들과 포입니다.

어떤가요? 그럴듯하게 그려졌나요? 갈 길이 멀지만 도달하지 못할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그렇겠죠. 마음먹기 나름이란 표현은 물리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소소한 새 출발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붙으면 겁내던 다른 것들에 손을 내밀어 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가겠습니다. 늦가을에 새롭게 시작하는 봄입니다. 그 길 양쪽에 노란 개나리가 활짝 폈으면 좋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