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소아완화의료기관인 '쓰루미 어린이호스피스' 이야기를 다룬 책 
일본 최초의  소아완화의료기관인 '쓰루미 어린이호스피스' 이야기를 다룬 책 

너무나 일찍 환자가 된 아이들이 있다. 유타(2살, 소아암 환자)의 부모는 아들이 끝내 낫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혼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의사가 말했다.

“이대로 치료를 계속해도 아이는 병실에서 괴로워하며 죽어갈 뿐입니다. 나을 가망이 없는 이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괴로운 치료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충실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유타 부모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 욕심으로 유타를 침대에 묶어두기보다는 짧은 시간이라도 유타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주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전부 유타를 위해 썼어요. 유타와 후회 없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기에 우린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죠.”

책 <어린이 호스피스의 기적>은 유타와 같은 시한부 어린이 환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이 하나가 돼 깊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담아냈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일본 최초의 어린이 호스피스인 <쓰루미 어린이 호스피스>의 탄생과정과 운영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에 기반해 실감있게 풀어간다.

쓰루미 어린이 호스피스가 지향하는 점은 깊게 사는 것 (Live Deep)이다. 한 번 한 번의 만남을 제대로 마주하고 그들의 인생에 가능한 한 깊게 스며들어 소중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이다.

“단 한 번이라도 깊게 살 수 있다면 짧은 생은 비극이 아닌 성장의 거름이 된다”

쓰루미 호스피스에 오면 장난감을 독차지하는 것도, 정원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악기를 마음껏 연주해 볼 수도 있고 캠핑을 할 수도 있다. 이곳은 죽어가는 환자의 마지막을 돌보는 곳이 아니라 난치병 아이들이 짧은 시간이나마 병원에서 벗어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기 위한 집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를 위해 친구와 가족들을 초대해 작별 파티를 열수도 있다. 아이가 떠난 후에도 함께 아이에 대해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1996년까지만 해도 일본의 난치병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돼 병원이나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삶을 강요받았다. 이 책은 그런 치료에 의구심을 가진 두 소아과 전문의 <하라 준이치>와 <다타라 료헤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간호사와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보육교사, 병원놀이 전문가 등이 한 팀을 이뤄 아이 중심의 의료로 깊이를 더해간다.

두 소아과 전문의가 일본의 의료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건 지난 1982년 영국 옥스포드에 지어진 세계 최초 어린이 호스피스 <헬렌 & 더글라스 하우스(Helen & Douglas House)>를 견학하고 온 이후다. 이곳에서 만난 프랜시스 수녀는 ‘헬렌 & 더글라스 하우스’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는 아이들이 죽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살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직원들도 아이들에게 친구로 다가가지요. 아이들을 환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해요.”

어린이 호스피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짧게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유의미하게 보내는가가 중요한 장소란 뜻이다. 이용자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아암 환자도 있지만 평생 침대에서 누운 채로 지내야 하는 신경근 질환이나 선천이상 증후군 아이들도 있다. 어디까지나 이 아이들이 아이답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걸 지향한다. 이곳을 다녀온 뒤 두 소아과의사는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몸에 칼을 대고 항암제를 맞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아이들은 힘든 치료를 참아가며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어른들을 원망합니다. 의사를 믿고 따라온 부모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24시간 간호로 인해 부부 사이가 멀어져도, 남겨진 다른 자식과의 관계가 나빠져도 그리고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나도 아이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치료에 협조했어요. 하지만 일본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 제도가 없어서 아이가 난치병에 걸리는 순간 그 모든 짐은 가족들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지켜보기 힘들었던 것은 아픈 아이들이 무너져가는 가족을 보며 자신의 탓이라며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이는 고통만 받은 채 숨을 거뒀고 남은 가족은 가정으로 돌아가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아이의 긴 투병으로 즐거웠던 추억은 남아있지 않다. 이 책은 두 소아과 전문의가 자신들의 의료 세계관을 ‘치료’ 우선에서 ‘아이 먼저(Children First)'로 바꿔나가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변화 과정을 동참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책 출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호스피스가 겪은 실패부터 성공까지 남김없이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정답 일수는 없어요. 때론 이곳에서도 아이들이 외로움을 느끼고 가족들이 당황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직원들이 무력감에 빠지기도 할 거예요.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모여 미래를 비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오는 2023년 국내에서도 최초로 독립형 어린이 단기 돌봄 의료 시설인 ‘서울대학교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가 문을 연다. 이 시설이 개원하면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소아환자와 가족들에게 어린이 전문 단기 의료 돌봄 제공시설이 마련돼 환아와 가족들의 휴식과 재충전을 돕게 된다.

◇ 어린이 호스피스의 기적 / 이시아 고타 지음 / 정민욱 옮김 / 궁리 펴냄 / 296쪽 /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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