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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굶겨 사망에 이르게 한 청년의 2심 재판이 열렸다. 우리 사회에 ‘간병 살인’이란 무거운 화두를 던졌던 그 청년은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참여 방청석엔 또 다른 청년이 조용히 앉아 판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가 조기현. 그는 20살 때 아빠의 아빠(보호자)가 된 가족 돌봄 청년(Young Carer)이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게으른 성격 탓에 장애 급여나 복지 신청을 삼촌이 알려줬음에도 신청하지 않았다”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할 때 그는 ‘이건 아닌데’라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굶겨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복지 신청을 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될 수 있나요?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할 건 왜 그 어떤 돌봄 정책이나 복지정책도 그 아버지와 아들의 삶에선 작동하지 않았는가라는 점입니다.” – 조기현 작가

지난 10년 동안 조 작가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는 가족 돌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화될 수 있길 바라며 2권의 책을 냈다. 지난 달 발간한 책 ‘새파란 돌봄’은 1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가족 돌봄 청년 경험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쓴 책이다.

이 책은 현재 가족돌봄 청년이거나 과거 가족돌봄청년이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내용을 토대로 돌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이 책은 현재 가족돌봄 청년이거나 과거 가족돌봄청년이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내용을 토대로 돌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신길동 한 카페에서 만난 조 작가는 “돌봄이 남자라고 해서 혹은 젊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라고 말을 꺼냈다.

 

N인분의 삶

2019년 ‘아빠의 아빠가 됐다’라는 책을 낸 후 그에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9년 동안 돌봤던 과정을 욕먹을 각오로 솔직하게 쓴 글에 대해 전 연령층에서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SNS 댓글과 메일이 쏟아졌다.

그의 강연장에는 그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청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규모는 작지만 가족 돌봄 청년 자조모임인 ‘N인분’도 만들 수 있었다. 가족 돌봄 청년이란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장애나 정신, 지체 질병 등을 겪고 있는 가족까지 돌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후반의 청년들을 말한다.

조기현 작가. 그는 메이커와 작가로 일하면서 치매에 걸린 50대 아버지의 아빠로 살아가는 1992년생 청년 보호자다. / 사진= 백선기 에디터
조기현 작가. 그는 메이커와 작가로 일하면서 치매에 걸린 50대 아버지의 아빠로 살아가는 1992년생 청년 보호자다. / 사진= 백선기 에디터

“전 뭐라도 해보려던 20살에 아버지가 쓰러져 2인분의 삶을 짊어져야 했어요. 누군가는 1.5인분, 3인분처럼 부모님뿐 아니라 어린 동생들까지 돌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생계는 물론 학업과 진로 등 생애 전반에 어려움을 겪게 되죠. N인분은 여러 사람의 삶을 함께 짊어지면서도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을 궁리해 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위로가 됐다”면서 “자조모임은 내 안에서부터 무엇인가 회복력을 끌어올려 주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난 효자가 아니라 시민입니다.

조 작가는 보건복지부 청년정책 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모든 활동은 '효자가 아니라 시민' 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혀있다.

가족 돌봄 청년들을 만나보면 어떻게 그 험난한 과정을 다 감당해냈는지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저도 실은 어떻게 견뎠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살려고 아등바등했고 일단 눈앞에 보이는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했어요. 제가 효자라서 혹은 아들이라서 10년의 시간을 버텨온 건 아닙니다. 저 역시 ‘도망가야지, 그냥 내버려 둘까’ 이런 나쁜 생각들을 무수히 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아프다는 이유로 50대 아버지의 삶이 한순간에 고꾸라지는 걸 보고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조 작가가 참여하고 있는 보건복지부 청년 정책 만들기 특별위원회 회의 모습. / 사진 출처 = 보건복지부 
조 작가가 참여하고 있는 보건복지부 청년 정책 만들기 특별위원회 회의 모습. / 사진 출처 = 보건복지부 

그는 “가족이니까 무조건 돌봄을 책임져야 한다” 가 아니라 “돌봄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공동체를 살아가는 시민이니까 어떻게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가족단위가 점점 축소되고 인구 재생산 지수가 낮아지는 상황에서 돌봄은 가족 중심에서 벗어나 사회와 유기적으로 안전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앞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은 청년의 사례만 봐도 그가 복지 신청을 시도조차 안한 건 아닙니다. 주민센터에 전화도 했었고 무일푼으로 퇴원 후 복지신청을 하려니까 증빙서류를 준비하는데 돈이 필요했어요. 이처럼 현행 복지가 지닌 진입장벽이나 접근성은 고려하지 않고 한 개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점은 제가 가장 해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월세가 계속 밀리고 단전, 단수가 되는 상황에서 집주인이나 알바를 했던 편의점 사장님, 혹은 주변 친지와 이웃들이 안전망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돌봄의 성별 역할 규범 사라져야

그는 “가족 돌봄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부장제의 성별 역할 규범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돌봄을 이야기하는 주체가 될 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다가설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간 우리 사회의 돌봄은 50-60대 여성들에게 떠넘기는 형식으로 유지돼왔습니다. ‘대한민국 요양 보고서’라는 탐사 보도에 따르면 중장년 여성 요양보호사들은 돌봄 노동으로 임금을 벌면서도 자녀를 돌보고 손주를 키우고 집안일까지 책임집니다. 우리 사회는 돌봄의 짐을 한 사람에게 떠맡기면서도 사적인 영역이라고 치부해 아무런 가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아요. 이제 어떻게 하면 모든 시민이 계층이나 인종, 성별, 가족 배경과 상관없이 동등하게 돌봄에 접근하고 혜택을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래야 돌봄의 무임승차가 사라질 수 있어요.”

 

아파도 일할 수 있는 권리 보장해야

그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주제는 ‘치매 노동권’이다.

“노동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입니다. 소득 보장도 해주고요. 자기효능감이랄까요? 아프다고 해서 무조건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경기도 시흥시와 인천광역시의 치매안심센터에서 초기 젊은 치매 환자들을 위한 일자리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이곳들을 방문 취재해 보고 치매 노동권 문제를 공론화해볼 생각입니다.”

조기현 작가가 만든 아버지의 노동을 기록한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 의 한 장면. 그는  아버지에게 치매가 시작됐어도 여전히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팔씨름 하는 장면을 찍었다.
조기현 작가가 만든 아버지의 노동을 기록한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 의 한 장면. 그는  아버지에게 치매가 시작됐어도 여전히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팔씨름 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는 “사회적 경제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장애인 일자리 모델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1포 10kg 100개의 생애>“젊은 초기 치매 환자들의 특수성은 숙련된 직업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인지능력이 다소 떨어져도 직업적 몸의 기억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직무를 개발한다면 지역공동체에 이로운 노동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령화사회에서는 주거권과 돌봄권 만큼이나 노동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치매 노동권은 ‘치료’의 목적보다는 취약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조 작가의 아버지는 부천에 자리한 어느 종합병원에 입원해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혼자 돌본다. 그가 묻는다.

“아버지와 나, 아무도 희생하거나 배제되지 않는 삶을 꿈꾸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요? “

사진제공 = 조기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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