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 하면 대부분 2002 한일월드컵을 꼽을 듯하다. 한국축구는 200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상징적인 해가 분명하다. 하지만 ‘체제(體制)’라는 단어를 통해 한 발 더 들어가 보면, 월드컵 유치를 확정지은 1996년을 기점으로 한국축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한국축구는 ‘96년 체제’에 있다.

국어사전은 체제를 ‘생기거나 이루어진 틀’,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에 비하여 볼 때, 그 조직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로 설명한다. 프랑스 혁명의 구체제(앙시앵 레짐),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체제, 1987년 6월 직선제 개헌 후 87 체제 등을 통해 단어를 접하곤 한다. 혁명, 세계대전, 개헌 같은 묵직한 단어와 어울리니 괜히 어렵고 복잡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 일상 곳곳의 각 분야, 업계에도 분기점과 나름의 체제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 가요계를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 이전과 이후로, K팝이 서구 음악산업의 주류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듯이 말이다.

2002 한일월드컵 유치를 확정지은 1996년 여름은 한국축구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사진은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과 나가누마 일본 축구협회장./출처=대한축구협회
2002 한일월드컵 유치를 확정지은 1996년 여름은 한국축구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사진은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과 나가누마 일본 축구협회장./출처=대한축구협회

96 체제의 과잉. 국가대표팀 편중

96 체제의 한국축구는 과잉과 결핍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국제대회와 대표팀’으로만 작동하는 국가대표팀 편중은 과잉에 해당한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대표팀은 한국축구의 모든 화두였고 대표팀 성공을 위해 온 축구계가 작동했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이 이례적으로 많은 소집훈련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선수가 대표팀에 차출될 경우 프로팀은 전력 공백을 감안해야 한다. 팀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안방에서 열릴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와 개최국 체면을 유지할 좋은 성적이 1순위 과제였기에 순순히 응했다. 프로팀의 이런 희생은 그간 언론을 통해 ‘대승적 차원’이란 말로 가려져 왔다.

지난 해 가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와중 국가대표팀이 유럽에서 전지훈련을 가졌다. 우려했던 대로 선수단 내부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고 이 중 조현우 골키퍼가 있었다. 당시 조현우 선수는 울산현대 소속으로 아시아클럽대항전(AFC챔피언스리그) 참가를 앞두고 있었다. 코로나 확진으로 결국 대회에 불참한다. 국가대표팀 차출로 울산현대는 전력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같은 사례는 올해도 발생했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K리그 클럽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선수차출에 적극적으로 응한다. 전북현대, 울산현대, 대구FC, 포항스틸러스는 주전급 선수 일부를 제외하고 아시아클럽대항전에 참가한다.

대표팀 차출이 민감한 주제인 건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프로팀이 반드시 차출에 응해야하는 기간, 대회 등을 특정해 조정에 나서는 이유다. 하지만 지난해 유럽전지훈련과 올해 올림픽대표팀 차출의 경우 단순훈련이었다. 이와 달리 프로팀은 중요한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프로팀 피해를 감수, 혹은 강제시켰다는 점에서 ‘프로팀은 응당 대표팀 차출에는 응해야 한다’는 96체제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팀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 차출이 당장 필요하며, 올바른가’라는 언론과 팬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프로리그와 프로팀이 한국축구에서 갖는 비중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며 96체제의 과잉(대표팀 편중)이 한계에 달했다는 신호기도 하다.

96 체제의 결핍. 내셔널컵 정체성 부재

96 체제의 결핍은 대한축구협회가 운영하는 FA컵의 정체성 부재를 꼽을 수 있다. 통상 각국 축구협회의 FA컵은 국가적 상징을 갖는다. 대회를 내셔널 컵(National Cup)이라 부르는 이유다. 프랑스의 프랑스컵, 이탈리아의 이탈리아컵, 독일의 독일축구협회컵, 스페인 국왕컵, 일본의 천황배 등 국가명이나 국가적 상징을 이름으로 삼는 배경이다.

이를 참고하면 대한축구협회 FA컵의 공식명칭은 코리안컵 내지는 대한축구협회컵(KFA컵)으로 불러야 맞다. 하지만 공식 명칭은 그냥 ‘FA컵’이다. 2002 월드컵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잉글랜드의 겉모습만 모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축구종주국 잉글랜드는 협회와 대회 이름에 국가명을 쓰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월드컵을 유치한 1996년을 FA컵 원년으로 꼽는 배경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담아야 할 내셔널 컵에 ‘K’가 빠져있는 이유다. 1996년 이래로 이어지는 문제다.

각국 FA컵 대회 로고. 일본의 천황배(일왕배), 프랑스의 프랑스컵(Coupe de France)과 달리 대한축구협회의 FA컵에는 국가적 상징을 찾아볼 수 없다./출처=각국 축구협회
각국 FA컵 대회 로고. 일본의 천황배(일왕배), 프랑스의 프랑스컵(Coupe de France)과 달리 대한축구협회의 FA컵에는 국가적 상징을 찾아볼 수 없다./출처=각국 축구협회

KFA컵 정상화를 통한 질적성장이 필요한 '포스트 96 체제'

96 체제의 문제점 두 가지(대표팀 편중, FA컵 정체성 부재)를 살펴봤다. 문제만 짚었지만 한국축구가 비약적 양적성장을 일군 소중한 시기였다. 이제는 양적성장 위에서 어떻게 질적성장을 만들어 갈지, ‘포스트 96 체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포스트 96 체제는 대표팀 편중을 완화하고 지역팀 활성화가 중요한 과제며 이를 위해 내셔널 컵(KFA컵)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전 세계 국가대표팀이 월드컵(FIFA컵)을 놓고 경쟁한다. 이 과정은 전 세계 팬들을 열광시키고 참여한 선수는 명예를 느낀다. 만약 월드컵이 아무런 정체성 없이 운영된다면? 선수와 팬들의 폭발적인 관심은 없을 것이다. 한국축구가 2002년 경험한 16강, 8강, 4강의 거대한 서사는, 우리의 실력 이전에 FIFA 월드컵이 명확한 정체성을 갖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냈던 순간. 토너먼트 단계를 거치며 만들어지는 축구팀의 서사를, 이제 지역팀 단위에서도 만들어 가야 한다./출처=대한축구협회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냈던 순간. 토너먼트 단계를 거치며 만들어지는 축구팀의 서사를, 이제 지역팀 단위에서도 만들어 가야 한다./출처=대한축구협회

피파의 월드컵이 전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한국축구에 잊지 못할 경험을 제공했듯이, 대한축구협회의 내셔널컵(KFA컵) 역시 명확한 정체성을 갖춰 각 지역(선수와 팬)이 축구를 통해 서사를 써갈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해야 한다. 2002년의 경험이 지금껏 대표팀을 향한 관심과 응원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역 팀에 얽힌 한 번의 서사를 경험했는지 여부는 축구가 더 많은 팬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짓고 이는 곧바로 한국축구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FA컵 공식 명칭에 알파벳 K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사소한 문제가 내포한 엄청난 차이다.

대표팀 편중 96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질적 성장은 ‘월드(국제대회)-네이션(국가대표팀&KFA컵)-로컬(지역팀)’이 함께 맞물려 작동하는 한국축구를 뜻한다. 그리고 KFA컵은 월드와 네이션을 로컬로 이어줄 수 있는 핵심 중 핵심이다. 대한축구협회가 ‘국가’란 이름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곳은 대표팀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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