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노래자랑!!”

매주 일요일 낮 시간을 채우는 송해 할아버지의 전국노래자랑 오프닝 멘트다. 1980년 11월 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 4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긴 기간만큼 ‘전국(全國)’은 우리 일상에 친숙한 단어다. 연예인, 정치인 등 누군가의 인지도와 인기가 치솟으면 전국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각 지역 체육인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대회 이름도 전국체전이라 부른다. 앞서 언급한대로 노래 실력을 뽐내도 전국을 무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축구도 해방 후 1946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진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열린 대회 이름은 전조선(全朝鮮)축구대회였다.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로 이름을 바꾸며 명맥을 잇던 대회는 1940년 일제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며 중단됐었다. 그리고 1946년 다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해방 전까지 전조선이었던 대회는 왜 전국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1942년 2월 자진해산하고 1945년 12월 다시 만든 조직 이름은 기존 그대로 ‘조선축구협회’였는데 말이다.

전국의 국(國)은 가치중립적인 단어다. 똑같은 국민(國民)이지만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줄인 국민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대학 이름에 붙인 국민이 다르듯 단어가 똑같아도 의미는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건 단어의 맥락이다. 그러므로 전국축구선수권대회의 전국도 대회가 창설된 1946년, 해방정국 3년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

1946년 열린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선수단./출처=대한축구협회
1946년 열린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선수단./출처=대한축구협회

“일본 본토가 완전히 점령당해도 최후의 1인까지 싸우겠다”며 항전 의욕에 불타던 일본은 1945년 8월 10일 돌연 항복의사를 밝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다. 이즈음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8일) 만주일대를 손쉽게 접수하며 한반도로 향했다.

이와 달리 오키나와에 머무르던 미군. 소련이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미국은 소련에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분할점령을 제안한다. 두 미군 대령이 지도를 펴놓고 30분 만에 그은 선이었다. 소련은 이를 수용했고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는 해방과 분단이 함께 찾아왔다.

애초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치안권과 행정권을 담당하며 해방 후 생길 수 있는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하지만 맥아더 포고령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도, 이들이 수립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아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해방된 한반도에는 ‘조선’도, ‘대한’도 없었다.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 앞. 시민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출처=퍼블릭 도메인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 앞. 시민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출처=퍼블릭 도메인

정당(政黨)은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를 품는 조직으로 이름에 그 뜻을 담곤 한다. 정당 이름을 살펴보면 한 사회, 특정시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조선민주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남조선로동당. 해방정국 당시 활동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다. 한반도 역사 속에서 국호로 사용했던 한(韓), 조선(朝鮮), 고려(高麗)를 모두 접할 수 있다.

해방은 됐고 나라가 생긴다는데 그 이름이 ‘한’인지 ‘조선’인지, 둘 다 아니면 ’고려’인지, 외세가 그은 38선은 잠깐 그어진 건지 아닌지 모든 게 의문이던 해방정국 3년은 나라(國)의 맥락을 채운 기간이었다. 이런 상황의 한반도 문제를 논의코자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 모였다. 소련은 즉시 독립을, 미국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관련 소식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라고 보도(1945. 12. 27.)한다. 사실과 다른 명백한 오보였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사회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를 기준으로 쪼개졌고 한반도에 잘못 전해진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이 해방정국을 휘몰아쳤다. 일제가 식민지배를 신탁통치로 포장해 온 경험이 만든, 단어 자체가 안겨주는 거부감이 컸다. 보도 사흘 만인 12월 30일, 온건한 정치를 추구했던 현실주의자 고하(古下) 송진우가 원서동 자택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체포된 범인들은 신탁통치 찬성을 암살 이유로 들었다. 1947년 7월에는 남/북, 좌/우, 찬/반탁 세력을 한데 묶어낼 사실상 유일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던 몽양(夢陽)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같은 해 12월에는 우파의 거물 설산(雪山)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잇따른 거물급 정치인 암살이 야기한 파장은 매우 컸고 사회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줬다.

(왼쪽부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1947년 7월에만 테러 128건이 발생해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출처=퍼블릭도메인,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왼쪽부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1947년 7월에만 테러 128건이 발생해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출처=퍼블릭도메인,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정치가 스포츠에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스포츠에도 스며들기 마련이다. 1946년 3월 25일과 26일 이틀간 경·평 축구대항전이 열렸다. 1935년 이후 11년 만이었고 일제가 구기종목을 완전히 금지시킨 1942년 이후 4년 만이었다. 한반도 축구를 대표하는 양 팀의 대결, 늘 하듯이 평양팀이 서울을 찾았지만 길 사이에는 38선이란 게 생겼고 평양팀은 소련 경비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서야 서울을 방문할 수 있었다. 1945년 9월 11일 이래로 남북간 철도 운행도 멈춰있었다.

경기 후 평양에서 건너온 일부 선수는 서울의 친인척과 함께 시간을 갖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들은 38선을 다시 넘어가기 전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평양으로 꼭 초청하겠다”라고 약속했지만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꼭 초청하겠다는 새삼스러운 약속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라는 슬픈 예감이었고 이는 현실이 됐다. 해방정국 3년의 모습이다.

1949년 열린 제4회 대회에서 우승한 조선전업. 정부수립 후에도 대회 이름은 여전히 전국축구선수권대회였다./출처=문화역사연구소
1949년 열린 제4회 대회에서 우승한 조선전업. 정부수립 후에도 대회 이름은 여전히 전국축구선수권대회였다./출처=문화역사연구소

꿈과 이상, 혹은 야욕을 구현코자 했던 거물들의 희망과 좌절이 핏빛으로 엉기어 나라(國)의 맥락을 채웠던 해방정국 3년. 해서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복잡한 상황이라면 기존 이름 전조선(全朝鮮) 보다는 전국(全國)이 사상의 좌우, 이념의 남북에 구애받지 않고 한반도를 모두 아우르는 이름 아니었을까?

그렇게 1946년 11월 1일 시작해 2000년 10월 30일까지, 반백년간 한국축구의 중추를 담당한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한국축구의 명맥을 다시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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