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둔 한국축구. 한국은 1954년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상대팀은 헝가리와 터키. 이 중 헝가리는 ‘매직 마자르’로 불리며 무려 4년 간 무패행진을 달린 세계 최강팀이었다.

대표팀은 헝가리 전 10시간여를 앞둔 밤에야 스위스에 도착한다. 그마저도 선수단 전원이 아닌 11명만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함께할 교통편 마련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차와 미군용기를 얻어 탔고, 대표팀 사정을 들은 영국부부가 비행기 표를 양보하는 우여곡절 끝에 선발대가 스위스에 도착한다. 외상으로 빌려 입은 단복만이 월드컵 선수단임을 알려줄 뿐이었다.
 
대표팀은 실로 기워 등번호 모양새만 갖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경기는 0:9대패. 와중에도 경기 초반엔 헝가리에 대등하게 맞섰다 하니, 만약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한국축구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싶다. 열악한 당시 상황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어서 열린 2차전(터키전)에서도 0:7로 패하며 한국의 첫 월드컵 무대는 막을 내린다.

1954년 6월 열린 스위스 월드컵은 한국이 정전협정(1953.7.27.)을 맺은 지 채 1년이 안된 시기였다. 당시 스위스를 찾은 선수 20명의 소속팀은 헌병감실, 특무부대, 병참단, 해군 그리고 조선방직. 1950년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1차전(헝가리전) 경기모습./출처=대한축구협회
1954 스위스 월드컵 1차전(헝가리전) 경기모습./출처=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 ≥ 군대스리가’였던 시절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총성이 울린 후 한반도는 쑥대밭이 됐다. 정부는 피난을 떠났고 정전협정 때까지 부산에 머무른다. 정부도 피난 중인데 체육계라고 오죽했을까. 대한체육회는 부산시 광복동에 연락사무소를 마련했고 대한축구협회는 이곳에 책상 한 개를 펴놓고 축구인들 동정을 파악한다. 이듬해인 1951년 10월 6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대회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던 축구인들이 한 데 모이는 계기가 됐다.

이 즈음 군(軍)은 체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체육행사를 통해 탈환지구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이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축구, 빙상, 육상, 사이클 등 각 종목의 유명 체육인을 군에 입대하도록 했다. 운동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선수들 입장에서도 경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특무부대, 병참단, 헌병감실 등 1950년대 축구계를 주름잡던 군부대 축구팀이 하나 둘 생겨난다. 대부분 선수들이 군 팀에 몸담았기에 전국체전에 도시대표로 참가하는 팀도 거의 다 군부대 팀이었다.

1950년대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팀 명단에도 병참단·헌병사령부·특무대가 돌아가며 이름을 채웠으니, 독일 프로리그 분데스리가(Bundesliga)에 빗댄 명실상부 ‘군대스리가’의 한국축구였다. 앞서 살펴본 조선방직은 당대를 대표하던 팀 중 유일하게 군부대가 아닌 팀이었다.

전쟁이 비껴간 조선방직

1917년 11월. 부산부 동구 범일정(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조선방직이 문을 연다. 일제 산업자본이 만든 국내 첫 기계제 방직회사였다. 1925년부터 조면업을 시작했고 전국으로 사세를 펼쳐 나갔다. 장시간노동, 심야노동, 저임금 등 한국인 노동자를 착취해 만든 영광이었다.

일본의 경제체제에 종속돼 있던 국내 산업구조는 해방 후 큰 혼란에 휩싸인다. 하지만 조선방직은 계속 호황을 누렸다. 해외 동포들이 대거 국내로 돌아오며 면직물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자재는 원조를 통해 원활히 공급됐고, 의식주까지 통제하던 일제의 통제경제가 끝났기에 기업운영도 보다 자유로웠다. 전국 17개 지역에 설비시설을 갖춘 조선방직은 귀속재산(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 8 ·15광복 이전 일본인 소유재산) 중 최대규모를 자랑했다.

이어진 한국전쟁은 조선방직에 또 한 번 날개를 달아준다. 수세에 몰린 대한민국은 낙동강 일대를 최후방어선으로 설정했는데 조선방직 생산시설이 방어선 안 부산과 대구에 있었다. 조선방직 부산·대구공장, 삼호방직 대구공장을 제외하고는 업계가 모조리 직간접적 피해를 입었으니, 생산설비를 유지하며 특수를 누린 조선방직은 전쟁 중에도 안정적 기업운영이 가능한 알짜 중 알짜였다. 온 나라가 전쟁터였던, 해서 군이 지배하던 1950년대 한국축구계에서 조선방직 축구단을 접할 수 있는 배경이다.

1951년 조선방직 선수단./=출처 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 100년사』, 134p.
1951년 조선방직 선수단./=출처 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 100년사』, 134p.

2014년 FIFA 회장상을 받은 일본축구 대기자 가가와 히로시는 “축구를 적는 건 사회를 적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와중에 구색만 겨우 갖춰 참가한 월드컵, 참가 선수 20명 대부분이 군부대 소속이던 시대, 유일한 기업팀 조선방직과 이를 가능하게 했던 낙동강 방어선. 이만큼 1950년대 초 한국사회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1954 스위스 월드컵 선수단의 흔적

당시 정권은 애초 조선방직을 부산지역 자본가 김지태 등에 불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선방직이 자유당 정권에 반하는 야당계 정치인 김지태의 정치자금이 될 것”이라는 이해관계에 따라 조선방직은 국영기업으로 지정된다. 이후 정권 측근 강일매가 기업을 손에 쥐었지만 경영은 방만했고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한다.

1968년 4월, 부산시는 조선방직 시설들을 철거했고 이듬해 7월 법인청산 절차를 매듭지으며 조선방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기업의 위세는 ‘조방’이라는 부산의 거리이름으로, ‘조방낙지’라는 요리이름으로 남았다. 아울러 대구공장 부지에는 대구시민운동장을 거쳐 대구FC의 홈구장 DGB대구은행파크가 자리했으니, 조선방직은 거리와 음식에 더해 축구에서도 자취를 남겨 두었다.

한국축구 중흥을 이끌던 1950년대 군대스리가 축구단들은 육군대표팀, 충의, 웅비 등으로 통폐합을 거쳤고 1984년부터 육해공(웅비, 해룡, 성무) 축구팀을 한데 모은 지금의 국군체육부대, 상무(尙武)로 개편됐다. 오늘날 김천상무가 그 명맥을 잇고 있으니, 1954 스위스 월드컵이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닌 셈이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