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와 조별예선 3차전에서 6:0 대승을 거둔 올림픽 축구대표팀이 오늘 밤 8시 멕시코와 8강 경기를 치른다. 한국축구는 2020 도쿄 올림픽에 앞서 1964 도쿄 올림픽에도 참가했었다. 당시 대표팀은 3패를 기록하며 조별예선(1라운드)에서 탈락, 일찌감치 대회를 마감했다. 도쿄에서 열린 두 번째 올림픽에 참가 중인 한국축구, 그런데 올림픽에 얽혀 도쿄를 찾은 대표팀이 한 팀 더 있었다. 86년 전 1935년 도쿄를 찾은 경성축구단이다.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을 겸해 열린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경성축구단./출처=대한축구협회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을 겸해 열린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경성축구단./출처=대한축구협회

‘지역대표’ 경성축구단

1936 베를린 올림픽을 1년 앞둔 1935년, 일본은 올림픽 참가를 위한 축구대표팀 편성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를 새롭게 창설한다. 이 대회 성적을 토대로 일본축구 대표팀을 선발하는 게 당시 일본이 내세운 기준이었다.

조선에서는 경성축구단이 대회에 참가했다. “조선축구협회는 도쿄에서 열리는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겸 올림픽 예선 대회에 조선대표로 경성축구단을 중심으로 17명 픽업팀을 편성하고 경성운동장에서 연습, 5월 24~25일경 출발할 터라고 한다.” 대회 출전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다.

경성축구단을 중심으로 했지만 라이벌 평양축구단 선수도 다수 소속돼있던 ‘픽업팀’은 오늘날 국가대표팀 전력이었다. 실력을 갖춘 대표팀은 있었는데 국가가 없었다. 전일본(全日本)의 일개 지역에 불과했던 조선의 지역대표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한다.

대회에 참가한 경성축구단 구단주는 당시 조선축구협회장 몽양 여운형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최정상급 선수로 꾸린 국가대표팀이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구단주를 맡고있는 부산아이파크 소속으로 대회에 참가한 격이다. 일제강점기 당대의 모습이었다.

경성축구단, 일본무대 제패!

준비를 마친 경성축구단은 지금의 도쿄올림픽스타디움 자리에 있던, 메이지신궁경기장으로 향했다. 조선을 포함해 관동, 북해도, 동북, 관서 등 일본 각 권역별 팀이 6월 1일, 2일 이틀간 열린 대회에 참가했다.

경성축구단은 유력한 우승후보였고 세간의 관심에 부응했다. 나고야고등상업학교와 맞붙은 1차전에서 6:0 대승을 거둔다. 이어진 결승전 상대는 도쿄문리대학이었다. “경기가 진행되며 드러나는 실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고, 관중석 절반을 조선인이 채워 자못 응원이 열렬했다.”는 <조선일보> 김동진 특파원의 현지 보도가 말해주듯, 6:1이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올림픽 선수선발을 겸한 대회에서 식민지 조선출신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일본은 그 해 가을 있을 메이지신궁경기대회 성적을 함께 고려한다는 방침을 추가로 세운다. 메이지신궁경기대회는 우리의 전국체육대회와 격이 같은 대회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우승한 팀도 경성축구단이었다. 일본이 올림픽 대표팀 선발지표로 삼은 두 대회에서 조선출신 경성축구단이 모두 우승해 버린다.

2명 선발. 1명 출전. 나라없는 설움

당시 조선축구협회는 일본대표팀의 절반 정도는 경성축구단에서 선발할거라 예상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볼을 공중에서 걷어내는, 발리슛을 연상시키는 선진기술로 화제를 모은 수비수 정용수는 “이 정도 현지 반응이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겠다” 싶었고 서울로 돌아온 뒤 주위 사람들에게 술을 살 정도였다. 경성축구단의 경기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올림픽 선수 명단을 전하는 일본 신문기사. 경성축구단 성적에도 불구하고 김영근(오른쪽 가장 아래)과 김용식(오른쪽 밑에서 네번째) 두 선수만 이름을 올렸다./출처=문화역사연구소
올림픽 선수 명단을 전하는 일본 신문기사. 경성축구단 성적에도 불구하고 김영근(오른쪽 가장 아래)과 김용식(오른쪽 밑에서 네번째) 두 선수만 이름을 올렸다./출처=문화역사연구소

하지만 축구계의 기대와 달리 대표팀 선발인원은 7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발표된 최종명단에는 7명에 한참 모자라는, 김용식과 김영근 2명만 포함됐다. 애초 소문대로 7명을 선발했지만 “조선선수 상당수를 포함해도 베를린 올림픽 성적이 좋지 않을 것”이란 궁색한 주장이 나올 정도로 반발이 커 인원을 축소한 결과였다.

일본축구협회의 처사에 크게 분노해 조선축구계 내부에서는 올림픽 참가를 거부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민족차별이 분하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게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본대표팀 소집 후에도 이어진 괄시와 차별 속에서 김영근은 스스로 하차했고 김용식은 베를린으로 향했다.

86년 전 선배들의 기세를 닮은 올림픽 축구대표팀

1936 베를린 올림픽 일본대표팀. 본선에서 스웨덴을 격파하며 일본축구 첫 A매치 승리 기록을 남겼다. 뒷줄 오른쪽 두번째 김용식 선수./출처=문화역사연구소
1936 베를린 올림픽 일본대표팀. 본선에서 스웨덴을 격파하며 일본축구 첫 A매치 승리 기록을 남겼다. 뒷줄 오른쪽 두번째 김용식 선수./출처=문화역사연구소

1936 베를린 올림픽은 일본축구가 처음 참가한 국제대회였다. 그리고 1차전에서 유력한 우승후보 스웨덴을 3:2로 누르며 A매치 첫 승리를 거둔다. 초반에 2골을 먼저 실점했지만 이후 내리 세 골을 몰아넣으며 3:2로 역전했다. 경기 종료 5분 전 김용식이 20m를 단독 돌파한 후 마츠나가에게 어시스트하며 득점에 성공, 승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일본축구가 “당시 대표팀은 김용식이 핵심전력이었다.”라고 말하는 배경이다. 조선선수 중 유일하게 올림픽 무대에 나섰지만 경성축구단 동료들의 실력까지 충분히 입증한 활약이었다.

2020 도쿄 올림픽 온두라스전에 선발출전한 대표팀. 오늘 오후8시 멕시코와 8강전을 치를 예정이다./출처=대한축구협회
2020 도쿄 올림픽 온두라스전에 선발출전한 대표팀. 오늘 오후8시 멕시코와 8강전을 치를 예정이다./출처=대한축구협회

그로부터 80여 년이 훌쩍 지난 2021년, 2020 도쿄올림픽 축구대표팀이 1935년 경성축구단, 1964년 축구대표팀에 이어 다시 한 번 도쿄를 찾았다. 조별리그 3차전에서 온두라스를 대파한 모습은 1964년 대표팀보다는 6:0, 6:1이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일본무대를 휩쓸었던 경성축구단의 모습과 닮았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국가가 없어 차별 받았던, 그럼에도 당당히 실력을 입증했던 과거 선배들의 기세를 이번 8강전에서 그대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