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주민이 주인공이 되는 도시 재생

지역의 역사와 문화 발굴로 도시 재생을 일궈가는 '아트브릿지'



좁고 가파른 골목길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과 봉제 공장들. 하루 종일 재봉틀이 돌아가고 원단과 제품을 실은 오토바이의 질주 사이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걸어갑니다.

낙산을 경계로 문화의 메카 대학로와 인접한 창신동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표적인 문화예술소외지역입니다. 대학로에선 하루에 100여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지만 먹고살기 바쁜 창신동 주민들에게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으니까요.

봉제 공장과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창신동 좁은 골목길
하지만 창신동은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과 국민 화가 박수근 화백이 살았던 유서 깊은 문화의 동네입니다.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배우양성소인 '조선배우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죠.


?4년 전 창신동에 둥지를 튼 문화예술 사회적기업 아트브릿지(artbridge.or.kr/)신현길 대표는 창신동의 이런 역사적 배경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인 역사 ·문화 관련 콘텐츠로 동네를 재발견해나가고 있습니다.

신현길 아트브릿지 대표가 팟캐스트 '학부모를 위한 진로레시피'에 출연해 공연기획자로의 직업세계와 도시재생에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정동극장 문화 재단에서 공연기획팀장으로 활동하다 사회적 기업가로 변신한 신 대표는 팟캐스트 ‘학부모를 위한 진로레시피’에 출연해 “창신동에는 평생 사시면서 연극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들이 많다”며 “문화적격차를 해소하고 지역의 역사 발굴로 주민들 특히 동네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되돌려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발굴해 낸 역사적 인물은 박수근 화백입니다. ‘창신동 393-1 9통 4반’ 그는 박수근 화백이 살았던 당시의 상황을 그려낸 연극 ‘쪽마루 아틀리에’를 제작했습니다.

화가 박수근의 창신동 생활을 무대로한 연극 '쪽마루 아뜰리에'공연 장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박 화백은 미군 부대 피엑스(PX)에서 초상화를 그렸지요. 집으로 돌아와선 추운 겨울 마루에서 곱은 손을 호호 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모습에서 창신동의 아버지들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밤 늦게까지 재봉틀을 돌리고 오토바이로 배달하고 새벽에 눈을 떠 다시 봉제 공장으로 향하는 것이요.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박수근 화가와 창신동의 아버지들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창신동 마을 재발견의 시작은 주민 자치 도서관이자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인 ‘뭐든지 도서관’에서 출발했습니다. 아트브릿지는 이곳에서 전기수라는 역사 속 인물을 불러와 연극 배우들의 도움으로 재미있게 책을 읽어주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책 읽어 주는 선비 전기수 배역을 맡은 배우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전기수는 조선시대 동대문 밖에 살았던 선비로 종로를 드나들며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책을 읽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 속 실존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배우들이 시작했지만 부모님들이 동참하면서 도서관의 인기 프로그램이 됐고 ‘뭐든지 예술학교’가 탄생하는데 단초가 됐어요.

뭐든지 예술학교에서는 크게 3가지 활동이 펼쳐집니다. ‘책 읽어주는 선비 전기수’를 비롯해 연극 교실 '조선배우학교' 그리고 '맘껏 그린핑거'라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어요. 맘껏 그린핑거는 그림책 읽기와 원예를 융합한 프로그램입니다.

맘껏 그린핑거의 수업장면
“동네 어린이를 위한 문화 예술 교육에 앞서 학부모님들로부터 희망 사항을 조사했는데 자녀들의 문자 해독 능력을 높여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맘껏 그린핑거는 그림책을 읽고 난 후 그에 맞는 식물을 심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독서로 문자 해독 능력을 향상 시키고 식물을 만지는 활동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찾음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죠.”

2013년에는 타 기관과 연계해 지역의 교육 소외 및 돌봄 대상 아동들 35명에게 14~16주간 동안 수업을 진행하며 지역 기반형 복지 프로그램으로 큰 호응을 얻었답니다.

신 대표는 창신동이 문화 소외 지역이 된 데는 장시간 노동에 따른 시간적 여유 부족과 함께 문화 예술을 누려보지 못했던 경험이 큰 이유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창신동 지역 조사 과정에서 ‘조선배우학교’라는 역사 스토리를 발굴해 21세기판 조선배우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창신동의 지역아동센터를 비롯해 동네 아이들과 지역의 옛 이야기 '단종과 정순왕후' 등을 찾아내고 이를 연극으로 꾸며 발표했어요. 지금까지 총 80여명이 참가했습니다.

부모들을 위해선 ‘나도 배우다’라는 예술학교를 개설한 데 이어 전 연령층이 참여하는 뮤지컬 교실도 열었습니다. 전문 배우처럼 능숙한 솜씨는 아니지만 이들은 연 1회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공시설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연기력을 자랑하며 돈독한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나도 배우다'에서 지역주민들이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들이 연극을 하자 엄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여성 잡지만 보던 엄마들이 시집도 읽고 연극을 보러 다닙니다. 자신감이 없던 아이가 연극의 주인공이 되면서 자신감을 회복했어요. 한 다문화가정의 아이는 베트남 출신 엄마가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자 친구들을 몰고 와 자랑하더군요. ‘ 저기 여주인공이 우리 엄마야’ 라고요.”

아트브릿지는 주민 자치단체와 예술가· 마을활동가·지역아동센터·협동조합등과 이른바 ‘창신마을넷’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어요.

“연극을 하다 보면 소품이나 의상이 필요한데 이곳은 봉제의 달인들이 모여 있잖아요.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과 MOU를 체결하고 이 분들에게 제작을 의뢰합니다. ”

품앗이는 '창신마을넷'에선 빼놓을 수 없는 미덕입니다.

“ 예를 들어 지역 방송국인 ‘라디오 덤’이 ‘퇴근 길 여유한잔’이라는 행사를 하면 우리는 무대나 진행을 도와줍니다. 청년 단체 '한다리 중개소'는 홍보를 도와주고요. 우리들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건 그냥 해주고 비용이 발생하는 건 시중가 보다 저렴하게 도와주지요.”

2015년에 열린 꼭대기 장터 모습
신 대표는 지난해 7월부터 창신마을넷 주최로 '꼭대기장터'라는 마을 축제이자 벼룩 시장을 열고 있어요. 다양한 물건과 푸짐한 먹거리 주민 장기자랑 그리고 재미있는 체험과 놀이가 곁들여진 작은 마을 축제입니다.

“지난 겨울 '친구네'라는 청소년 지역 센터 청소년 13명은 통영으로 졸업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6번에 걸친 꼭대기장터에서 차곡차곡 60만원을 모은 결과죠. 여행 경비가 모자라 장터에 나왔다는 말에 카페 ‘달커피’는 커피 원두를 원가로 제공해주며 이들을 격려해주었습니다.”

꼭대기장터에서 여행비를 마련해 통영으로 졸업 여행을 떠난 '친구네' 청소년지역센터 학생들
사회적기업 아트브릿지의 모토는 '문화 예술을 매개로 쉽게 우리 역사와 아시아 문화를 가르치고 그 수익금으로 문화소외 계층의 아이들에게 예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50만 명의 관객들이 아트브릿지가 제작한 다양한 콘텐츠를 관람했습니다.

역사탐험극 '소년이순신, 무장을 꿈꾸다'에서 아이들이 조선수군이 돼 왜군에게 공을 던지고 있다.

저소득층 지역아동센터를 위한 무료 공연 '별나무 이야기'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씨는 생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창신동을 무척 가보고 싶어했습니다. 세상을 뜬 뒤 더 이상 가볼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그가 바랬던 그리고 보고 싶었던 창신동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국토교통부는 2014년 창신동을 도시재생선도지역으로 지정해 이 일대에 200여억원의 자금을 투입할 전망입니다. 부디 창신동이 거듭나면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옛정취가 살아 숨쉬는 역사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해봅니다.

글. 백선기 이로운넷 에디터

사진제공. 아트브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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