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뭘 알겠어요.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SNS가 활발한 시기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총검으로 찌르고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공격하는 모습을 보니까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요.”

1980년 5월 18일. 열아홉 소년은 집에 오지 않는 친구를 찾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시내에 나서자 사람들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진압하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들은 모여 “6.25 인공(인민공화국) 시절보다 더 잔인하다”고 이야기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열아홉 소년은 그렇게 시위대에 합류했다.

42년 전 5월 18일. 광주 현장에 있었던 소년은 이제 육십이 넘은 나이가 됐다. 경창수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창엽경영지원센터장 이야기다.

경창수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창업경영지원센터장은 5월18일 열아홉의 나이로 시민군으로 참여했다.
경창수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창업경영지원센터장은 5월18일 열아홉의 나이로 시민군으로 참여했다.

“우리 집이 학운동이었는데, 학동 삼거리 근처 픽업 차에서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는 방송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 차를 계속 따라갔어요. 저쪽에서 장갑차를 밀고 오면 후퇴하고, 또 진격하고 왔다 갔다 했어요. 그렇게 도로를 다 뚫었어요.”

그러다가 공수부대에서 시신 두 구를 처리하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따라가 잡으려고 했지만 워낙 빨라 놓쳤다. 경창수 센터장은 “시신 두 구를 리어카에 싣고 태극기를 덮어서 오는데 정말 처참했다”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채였다. 협상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발포가 시작되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그는 “공수부대와 전면적으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나주, 화순, 송정 등 외곽지역으로 흩어졌고, 각 지역의 파출소에서 칼빈소총 등 무기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시신을 찾는 가족들에게 확인 시켜 주는 역할을 했어요”

계속 궐기대회에 참석하다가 그는 유가족들에게 시신을 확인시켜 주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본관과 민원실 사이에 시신 30구 정도가 있었다. 정문에서 시신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가족들이 많아서 그들을 모시고 들어와 시신을 보여드렸다”고 말했다. 혹시 계엄군 정보원들이 침투할 수 있어 확인을 마치면 나가도록 했다. 가족의 시신을 찾으면 관에 넣어 태극기를 덮은뒤 상무관으로 옮겼다.

“도청(구 전남도청) 앞에 상무관이라고 있는데, 거기에는 신원이 확인된 시신이 100구 정도 있었어요. 부모님과 가족들이 확인되면 이름 쓰고 시신을 상무관으로 옮기는 일을 했죠. 제가 두 세 분 정도 옮겨드렸을 거에요.”

저녁 10시쯤 됐을까. 민원실 2층 강당에 40여명이 모였다. 학생 등 총을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총을 나눠주고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이 진행됐다. 그는 “뜨거운 탄피가 떨어지니까 조심하라는 것과 노리쇠가 수동이어서 당기는 방법을 가르쳐줬다”고 했다.

“칼빈소총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 장난감 정도 수준은 될까요? 계엄군의 M16라는 총에 비하면 정말 너무 무모한 무기였죠.”

“너는 살아남아 역사를 전하라”는 말

경창수 센터장은 도청의 뒤쪽 문(후문)에 배치돼 총구를 담쪽으로 겨누고 경계를 섰다. 새벽 4시경, 안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경창수 센터장은 “안에서 총소리가 나서 ‘우리는 아군이다. 쏘지말라’ 했지만 계속 총알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너무 많은 총알이 날아와 포복 자세로 정문으로 기어갔다”고 했다. 정문에 도착하니 앉아있던 수위가 "무전이 다 끊어지고 모든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누던 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손에 파편을 맞았다. 10초 정도 흘렀을까. 허벅지를 꼬집어 보니 아팠다. “살았구나.”

어렵게 도청 본관 2층 왼쪽 첫 번째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에는 4~5명이 있었고, 밖에서는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너는 나이가 어리니 꼭 살아남아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라”고 했다. 철모와 군복을 벗어 사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열면서 포복 자세로 나갔다. 

“나갔더니 자기들끼리 ‘죽여버려야 해. 빨갱이 새끼들’이라는 말을 했어요. ‘정말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죽이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많이 맞았죠. M16 개머리판으로도 엄청 맞았고요. 한번은 개머리판으로 허리를 내리쳤는데 허리가 끊어진 것 같고, 배 안의 창자가 다 터진 것 같아서 배에 손을 대봤어요. 다행히 창자가 나오지는 않았더라고요.”

5월 27일에 잡힌 경창수 센터장은 같은해 7월 3일 풀려나왔다. 처음에 그가 찾아 나섰던 친구는 18일 공수부대에 잡혀 상무대 영창에 갇혀있다가 풀려났다.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의 현장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러다가 ‘노동자를 조직하고 정치 세력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네에서 지역 주민들이 활동할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져 1999년 안산의료생협(현 안산의료사협) 발기인대회를 열고 2000년 창립했다.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 영화, 드라마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 역시, 현대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회적경제 주체 중에서는 협동조합이 가장 민주주의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1인1표 등 협동조합과 민주주의가 잘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면서 “완성된 민주주의는 없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일들을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경 센터장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 것 처럼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지는게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 목숨을 내놨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지고, 발전했다”면서 오월의 광주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민주주의는 공기 같은 거거든요. 투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도 당연히 존재하죠.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젊은 세대 나름의 방식으로 유튜브나 미디어, 예술품을 통해서 자유롭게 표현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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