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아파트 / 사진= 백선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아파트 / 사진= 백선기

지난 보름여 사이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입가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시작되는 김도향의 노랫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연금생활자를 향해 달음박질치는 내 나이에 내 집 하나쯤은 장만했어야 했는데  그 중요함을 모르고 4년 전 집을 판 것이 화근이었다.

형편에 맞는 집을 고르느라 차일피일 집 장만을 미루는 사이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영끌을 해서라도 집을 샀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하지만 무모한 도전을 하기엔 내 주변 여건들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전 재산을 집에 묻어두고 쪼들리며 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내 집은 없었지만 2년 전만 해도 살만했다. 보증금이나 월세가 조금씩 오르긴 했어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고 10년 가까이 이사 갈 염려 없이 한 집에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친 집값’ 앞에서 난 속수무책이었고 그 사이 졸지에 벼락 거지가 됐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남은 생애에 내 집 마련은 요원해 보인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에 따르면 중위 소득 계층이 서울 중간 가격대의 집을 사려면 연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으면서 16.8년간 저축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 .12월 기준) 이는 KB 부동산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8년 이후 역대 최고치다.

그 상승세는 올해에도 식을 줄을 모른다. KB 국민은행에 따르면 2021년 4월 까지 서울의 평균 아파트 매매가격은 4년 전과 비교해 6억 원대에서 11억 원대로 무려 83%나 올랐다.

결국 내 집 마련은 일단 뒷전으로 미루고 당장 내 삶에 직결되는 전세난이 심상치 않아 계약 만기를 석 달 앞둔 시점부터 계속 재계약 조건을 집주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답변을 계속 미뤘다. 그러다 결국 ‘들어와서 살려고 하니 집을 비워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길로 부동산에 나가 시세를 알아봤다. 집값은 2년 전 보다 60%나 올라 있었고, 전세 시세는 2년 전 집값과 맞먹었다. 더 큰 문제는 무리해서 자금을 마련한다 해도 물건이 없었다. 1653세대에 이르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전월세 포함 물건이 나온 건 딱 2건이었고 그중 한 건이 직전 계약이 성사가 됐다고 했다.

부동산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전월세 물건을 알아봐 달라 부탁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주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사 갈 엄두가 안 나 시세를 반영해서라도 재계약을 하려고 했는데 아쉽다. 재계약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좀 일찍 해줬다면 이렇게까지 황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부동산에 문의해보니 현재 물건이 없어 계약기간 내에 이사를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라고..

그랬더니 10분도 안 돼 답이 왔다. 시세대로 재계약을 한다면 집에 들어오겠다는 계획은 철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딸 내외랑 같이 사는데 손녀 교육 때문에 당분간 강남에서 살 계획이라 최소 4년은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일련의 이 과정을 겪고 나니 심신이 너무 지쳤다.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선한 의도로 출발한 현재의 주택임대차보호법은 거꾸로 세입자를 더 힘들게 하는 모양새다.

주택임대차 보호법에 따라 임차인은 계약갱신청구권을 1회에 한해 사용할 수 있고 이 경우 임대인은 5% 이상 임대료를 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집주인이 들어와 사는 경우엔 예외다. 만일 집주인이 거짓말을 한 경우라면 임차인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다.

진위와 상관없이 임차인은 일단 집을 비워줘야 하고 이에 따른 이사비와 부동산 수수료를 감내해야 한다. 이후 주인이 그 집에 사는지 진위를 밝히기 위해 그 주변을 맴돌아야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임차인이 그런 쓸데없는 행위에 시간을 낭비하려 들까 싶다.

이 때문에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하다고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던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상당수는 요즘 졸지에 벼락 거지라는 씁쓸한 기분을 맛봐야 했으리라.

천신만고 끝에 지난주 한 커피숍에서 만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커피를 마시며 지난 보름 동안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서로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나에게 10년 가까이 집을 빌려주는 동안 집주인은 거의 2년마다 집을 옮겨 다녔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움직였지만 이사비와 부동산 수수료는 먼 곳으로 이사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임차인이 겪는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만 도미노 현상처럼 자신도 오른 전세비를 감당해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다음 번에는 ‘계약갱신청구권을 쓰세요’라고 말했다.

2년 후에 보자는 인사말을 나누고 카페를 나서면서 난 속으로 되뇌었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왜 써요? 그땐 부동산이 진정돼 월세든 보증금이든 좀 내려달라고 해야죠.’

이런 나의 꿈은 과연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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