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중학교 남학생들의 성을 착취하는 음란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최찬욱이 아동·청소년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됐다. 그는 이날 기자들 앞에서 “호기심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며 “더 심해지기 전 어른들이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네티즌들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가해자에게는 ‘가해의 시간’이 멈춰졌어도 피해자에게는 여전히 '피해의 시간'이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발언까지 연상되며 공분은 더 커졌다.

'피해의 시간'에 집중하면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사회적협동조합이 있다. 지난 6월 22일 서울시 영등포구에 있는 피해자통합지원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VICTREE, Victim Recovery Entire Support Social Coop)의 안민숙 이사장을 만나 피해자를 지원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들어봤다.

빅트리(VICTREE),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자가 원하는 지원 제공

빅트리는 2020년 경찰청 인가를 받고 설립된 경찰청 1호 사회적협동조합이다. 경찰 및 유관기관과 연계해 범죄·재난·재해 등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피해자들을 돕는다. 피해자 가족, 유족 및 사회적배려대상자에 심리상담을 제공하고, 법률적·경제적·사회적 지원과 함께 법정 동행과 신뢰인 동석 등 피해자 곁에서 피해 회복을 위한 맞춤 지원을 하고 있다.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안민숙 이사장.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안민숙 이사장.

"빅트리는 단기적인 지원을 넘어, 사건이 발생하고 재판이 끝나고 사건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나아가 피해자가 피해 이전보다 더 행복해질 때까지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합니다"

빅트리는 서울 서부, 인천, 인천 남부, 전북, 대구, 제주도에 지부를 두고 있다. 2020년 제5회 대한민국 범죄예방 대상 시상식에서 사회단체 부문 우수단체로 선정돼 경찰청 표창을 수상했다.

피해자 위해 만든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빅트리는 2020년 5월 ‘피해자 자기보호노트’를 만들었다.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발생일 및 조사 과정에서 피해 경위와 조사 내용 등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메모해 피해 상황에 관한 기억을 유지하고 추후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일관된 진술을 유지할수 있게 돕는 노트다.

그동안은 가해자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강압 수사를 막고 피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자기변호노트’ 밖에 없었다.

가해자를 위한 것은 있지만 피해자를 위한 것은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낀 빅트리는 피해자들이 경찰 조사에 앞서 주의해야 할 사항과 조사 과정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내용 등을 29쪽 분량에 담아 ‘피해자 자기보호노트’를 만들었다.

빅트리가 자체 제작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피해자가 경찰·검찰·재판 단계별로 피해 경위 및 조사 내용을 작성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빅트리가 자체 제작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피해자가 경찰·검찰·재판 단계별로 피해 경위 및 조사 내용을 작성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피해자들은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을 때 가해자 변호인 측의 질문 공세에 말문이 막히거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당혹스러워 경찰 조사와 다른 진술을 하는 등 실수를 많이 하기도 해요.”

빅트리가 자체 제작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경찰 단계, 검찰 단계, 재판 단계, 수사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 보호제도, 재판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 보호제도 등으로 내용이 구성돼 있다.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빅트리가 자체 제작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경찰 단계, 검찰 단계, 재판 단계, 수사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 보호제도, 재판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 보호제도 등으로 내용이 구성돼 있다.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노트에는 경찰·검찰·재판 단계별 피해조사 내용 메모란과 피해자 자가체크리스트 등의 내용이 담겼다. 경찰단계에서는 피해 발생 경위 및 경찰 피해자 조사 내용 기록, 경찰 단계 체크리스트 작성 등을 할 수 있다. 이후 검찰단계에서도 검찰 피해자 조사 내용 기록 및 검찰 단계 피해자 체크리스트 작성 등을 할 수 있다. 마지막 재판단계에서는 재판 증인신문 내용 기록과 재판 단계 체크리스트 작성을 하면 된다.

빅트리가 자체 제작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수사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 보호제도에 대한 내용.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빅트리가 자체 제작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 수사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 보호제도에 대한 내용.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이외에도 사건 발생 이후 시간 순서에 따른 수사 및 재판 절차, 수사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 및 피해자보호제도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빅트리가 제작한 ‘피해자보호노트’는 올해 3월 서울(관악, 강동, 강북, 구로), 경기(수원서부, 부천원미), 인천(서부, 연수)지역 경찰서에 400부씩 배포돼 시범운영 되고 있다.

피해자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피해자 지원 나서

안 이사장의 하루는 피해자 지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2011년부터 범죄 피해자 상담을 시작해온 안 이사장은 그동안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상당수 강력사건에서 피해자 상담을 맡아왔다.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이전에도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진행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 Y’ 등 다수 프로그램에 범죄피해 상담전문가로 출연한 안 이사장은 ‘피해자의 고통은 사건 발생 그날부터’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범죄피해자 지원제도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재판 출석할 때 피해당사자 혼자 출석하는 일이 없도록 동행 지원을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 5월 종영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 1회에서 범죄피해자 지원단체인 파랑새 쉼터의 대표가 ‘범죄피해자 지원 협의회 정기회의’에서 한 말이다. 이는 안민숙 이사장이 그간 현장에서 많이 해온 말이기도 하다.

'모범택시'는 피해자 가족들로 이루어진 '무지개 운수'의 직원들이 억울한 피해자들을 위해 대신 복수를 해주는 이야기를 그렸다. 

드라마는 매회 지금도 어딘가에서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혼자 있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피해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들에 대한 안내 문구를 자막에 넣었다. 마지막회에는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VICTREE)'에 대한 안내 문구가 등장했다.

드라마 ‘모범택시’가 많은 화제가 된 것과 관련해서 안 이사장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모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드라마에 적힌 빅트리 자막을 보고 각각 5000원, 1만 원, 2만 원을 후원한 후원자 3명이 있었다”며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 지원을 위해 내어준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고 말했다.

운영과정의 투명성과 지속가능성 위해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설립

안 이사장은 좋은 취지로 만든 조직이라도 실제 운영과정에서는 변질될 수 있음을 우려하며 빅트리를 처음부터 사회적협동조합 형태로 만들었다.

그는 “조금 더 투명한 재정관리를 통해 기관의 지속가능성을 이어가고자 사회적협동조합 형태로 빅트리를 설립했다”며 "제가 하고 있는 '피해자 지원'이라는 일을 잘 담아낼 그릇이 필요했고, '사회적협동조합'이 적절한 그릇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회적협동조합은 다중이해관계자 모델을 취하되, 일반 협동조합보다 사회적인 목적이 더욱 강화된 형태다. 전체 사업의 40% 이상을 공익사업으로 수행해야 하며 배당도 금지돼 있다.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VICTREE) 사무실
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VICTREE) 사무실

피해자 지원, 수년에 걸쳐 섬세하게 이루어져야…피해자들 간 커뮤니티 형성

“피해자 지원은 몇 번의 상담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피해자가 ‘이제 다 괜찮아요’라고 말할 때까지 도와줘야 해요. 특히 피해자가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어떻게 지내는지 수시로 살피면서 수년에 걸쳐서 도와줘야 해요. 하지만 아직 그런 시스템이 많이 부족하죠.”

가정폭력 피해 아동 지원은 오랫동안 아이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살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안민숙 이사장은 2018년부터 범죄피해가정 청소년들에게 여름에는 ‘Happy&Joy 생존 수영캠프’를, 겨울에는 ‘Happy&Joy 스키캠프’를 제공한다.

빅트리가 진행하고 있는 'Happy&Joy 생존 수영캠프'(왼쪽)와 'Happy&Joy 스키캠프' / 출처=피해자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 빅트리
빅트리가 진행하고 있는 'Happy&Joy 생존 수영캠프'(왼쪽)와 'Happy&Joy 스키캠프' / 출처=빅트리

캠프에서는 한 봉사자당 한 아이를 맡아 돌본다. 그날 하루만큼은 그 아이에게 온전히 관심을 쏟기 위함이다. 혼자 못 오는 아이가 있으면 봉사자들이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오기도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봄에는 승마캠프를, 가을에는 별 보기 캠프를 진행하려고 해요. 모든 캠프를 고급스럽게 구성하려는 이유는 아이들이 평소에 쉽게 접하기 어려운 활동들을 경험하면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캠프를 통해 인연을 맺은 가정폭력 피해 엄마들 간의 커뮤니티도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만나고 연락을 취하며 서로를 돌본다.

안 이사장은 사회적협동조합 방식으로 피해자들을 위한 쉼터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피해자가 빅트리에 보내온 꽃과 편지
한 피해자가 빅트리에 보내온 꽃과 편지

“피해자들이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꾸리고 이 공간에서 일도 할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나갈 생각이에요. 가정폭력 피해 엄마들을 조합원으로 받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취업을 돕는 활동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범죄 피해를 당한 청각장애인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최근 수어를 배우고 있다는 안 이사장은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가져다주는 ‘2차 가해’를 거두어야 한다”며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