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오랜만에 텃밭에 나왔다. 겨울이야 특별히 할 일도 없지만 눈과 빙판으로 진입로도 막히는 통에 이맘때가 돼야 나들이가 가능하다. 나는 우선 겨우내 씌워둔 비닐터널을 걷어내고 시금치, 봄동, 상추에게 봄바람을 선물한다. 겨우내 얼마나 답답했을꼬. 마늘 밭에서 보온용 볏짚을 치우니 여기저기 꼬무락꼬무락 새싹들이 보인다. 텃밭을 가꾸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새싹들과 인사하는 때가. 2.아직 땅이 다 녹지 않았지만 3월 중순이면 감자를 심어야 하기에 장소를 골라 미리 퇴비를 뿌려둔다. 올해 첫 농사인 셈이다.
1.그야말로 가족들이 호들갑이다.강의를 떠난 지 2년이니 꽤 오랜만이다. 비록 1주일에 두 시간 정도이지만 강의안 작성하고 과제 만드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 강의를 시작할 때면 늘 이렇게 긴장하는 버릇이 있다. 진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은 기본이다.몇 년 전에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져 시작부터 5분간 멍하니 서있기도 했다. 트리플 A형의 슬픔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강의 얘기가 나오면 나보다도 가족이 더 호들갑이다. 사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번역가, 작가잖아. 젊은 편집자들 만나야 하니
1.동생을 데리고 가출한 때가 1976년 봄, 내가 열일곱 살이었다.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며 괴롭히는 새엄마의 횡포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 곧바로 서울 구로동 형 집에 가서 몇 개월 지내다가 그 후 진주, 부산을 떠돌며 금은세공, 인쇄 등의 일을 배웠다. 2.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4년 후였다. 서울 북아현동으로 이사와 신촌로타리에서 인쇄 일을 하던 때였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아버지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았는지 동두천에서 신촌 인쇄소까지 찾아왔다. 인쇄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에
1.지난 아내의 생일. 새벽에 24시간 마트에 나가 굴을 사와, 굴미역국을 만들었다. 아내는 일어나 미역국을 먹고 출근했다. 음식을 시작하고 15년 이상 한 번도 아내의 생일에 미역국을 걸러본 적은 없다. 쇠고기미역국, 황태미역국도 해봤지만, 아내 입맛에는 굴미역국이 제일 맞는단다. 겨울에 태어났으니 굴미역국이 제격이기도 하다. 2.생일에 아내를 위해 해줄 건 아침 미역국밖에 없다. 결혼 초기 먹기 살기 어렵다는 핑계로 생일선물을 생략하기로 합의한 터라, 지금껏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해본 적은 없다.
1.“형아, 저 두꺼운 프린트 묶음이 뭔지 알겠어?”“응? 아니 모르겠는데?”“방탄소년단 노래들 가사를 모두 뽑아서 인쇄했어요. 무슨 얘기인지 잘 안 들려서.”아내는 요즘 남자 아이돌 그룹에 푹 빠져 있다. 이따금 유투브까지 뒤지며 동영상을 찾아보고 방탄소년단이 나온다고 하니 지난 연말 가요프로그램도 꼭꼭 챙겨서 봤다. 식사를 하면서 화제의 절반은 방탄소년단이다. 덕분에 나도 이런저런 아이돌 그룹의 노래와 이름에 익숙해지고 있다. 방탄소년단, 엑소, 위너, 트와이스……2.아주 아주 옛날, 아내는 조용필한테 빠져
23. 가지탕수육과 새해 다짐 1.2019년은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되는 해다. 예전 세대라면 환갑이니 회갑이니 호들갑을 부릴 나이건만 난 이상하게도 심드렁하기만 하다. 나이 예순?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심정?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마흔이 되던 해가 더 정신적으로 충격이었던 것 같다……세상에 내가 벌써 이렇게 늙다니!2.더 이상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가 된 걸까? 사실, 이 나이가 되면 나이가 아니라 건강이 문제다. 오는 나이는 있어도 가는 나이는 없다지 않는가. 바람이라면, 늙는 건 상관없는데 병치레에 시달리며 지내고 싶지는
21.크리스마스 통오리오븐구이와 지도교수님1.“영학이 널 보면 정말 종교인 같아.”“예? 선생님, 전 종교가 없습니다.”선생님은 물리적인 종교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서 늘 뭔가를 갈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고 하셨다. 그랬던가? 대학원 시절, 가난과 싸우며 허겁지겁 수업을 쫓아다니는 꼴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2.“사람이 제일 다이내믹할 때가 언제인줄 알아? 영학이가 잘 알겠다. 네 얘기니까.” 수업시간에 느닷없이 이런 질문도 하셨다. 난 얼떨결에 “좋아하는 일을 할 때”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정정해주셨다.
20. 소고기무국과 술탐1.건강한 편이다. 어릴 때 결핵에 세 번이나 걸리는 등, 큰 병치레를 자주 한 데 비하면 요즘은 잔병도 잘 걸리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직업이기는 해도 매주 텃밭에 나가 땀을 흘리고 산행을 즐긴 덕이리라. 얼마 전 건강검진도 그럭저럭 선방이라고 자평한다. 대개는 정상인데 다만 혈압이 조금 높고 간수치가 살짝 정상치를 넘어섰다. 이제는 아랫배도 눈에 띄게 부풀었다.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나 아무래도 그놈의 식탐과 술탐이 문제다. 2.내가 만든 밥이 맛있고 내가 빚은 술이 맛있으니 어찌 하랴.
19. 단호박죽과 책임감1.'저자가 되면 책임을 져야 해요.'출판사 대표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북토크, 북콘서트, 강연, 방송 출연 등, 책 판매를 위해 저자도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요구다. 적어도 마음만은 그렇다. 2.지난번에 부끄러운 책을 하나 내고 나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강연, 인터뷰……그 정도는 나도 불만이 없다. 문제는 언제나 방송출연이다. 방송일정만 나오면 그때부터 머릿속이 하얘지고 식욕이 없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겠으니 말이다.3.결국 가까스로 두 번의 라디오방송을 치르면서 진행
17. 1.소셜미디어에서지만 요즘 나를 ‘사부’로 삼겠다는 중년남성들이 몇 분 있다. 물론 농담처럼 하는 얘기지만 실제로도 종종 자기가 만든 음식을 소셜에 올리고 자랑스럽게 요리법을 공개하기도 한다.아니, ‘사부로 삼을 생각’은 없다 해도 요리에 도전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에 요리를 했던 남자들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예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2.얼마 전 만난 선배는 안식년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요리학원에 등록했는데 요리가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