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정말 덥습니다. 햇감을 먹어보지 못한 추석은 올해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주로 여름에 오던 태풍은 한없이 강력해졌고, 그동안 준비했던 것보다 더욱 무섭게 우리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안방에서 곤히 자는 딸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그래서 요즘 민주시민교육을 할 때면 모든 수업을 기후위기와 관련해서 진행합니다. 참정권, 인권도 기후위기와 함께 교육합니다. 교육할 때는 climateinteractive(UN 기후협약 시뮬레이션, 탄소중립을 위한 조건 시뮬레이
현 정부 들어와서 시작되었던 도시재생뉴딜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이다. 어느 지역에서든 특히 우리동네살리기 유형을 통해 도시재생 초기부터 주민들의 참여가 활발했던 곳들이 우리동네를 살리는 성과를 내고 있다. 그 주민들은 청년들이기도 하고 상인·건물주인 등이다. 또 오랫동안 지역에서 살아오신 7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도 있다. 초기에는 동네의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동네를 신선하게 해 줬다. 그들이 헌신한 곳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적지 않은 정부 예산이 들어간 사업이지만 지역주민들이 자발
성심당이 사회적경제 기업인가? 성심당(聖心堂)은 대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르고, 대전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빵집이다. 성심당 대표는 빵집의 이름을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할 정도로 대를 이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성심당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할 때 교황의 식탁에 올린 빵을 만들었을 정도로 전문성 있고 신뢰가 높다.성심당의 탄생, 성장과 위기, 그리고 경영철학 등은 2016년 ‘남해의봄날’에서 출판한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필자는 ‘성심당은 사회적경제 기업인가?’라는
지난 5월 24일 한국천주교회는 지속가능한 세계로 가기 위한 7년 여정을 시작하는 행사를 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받으소서』에서 제시한 통합생태론의 관점에 따랐다. 통합생태론은 환경위기와 사회위기가 별개의 위기가 아니며 생태문제 해결은 존엄한 사회의 회복과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인간에게 말한다.현재 기온 상승으로 인한 온난화 피해는 산업의 붕괴와 해수면 상승, 물부족과 빈곤 등 인류 생존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한 전세계적인 탈탄소 전환 움직임이 이어진다. 2018년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5월 3일 대전에서는 ‘사회적경제 세대별 인터뷰’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2030세대, 40대 그룹, 그리고 5060세대 등 세 그룹으로 나눠서 각자 네다섯명의 세대그룹을 대표하는 사회적경제 대표자들과 인터뷰를 사전에 한 뒤, 당일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발제하고, 주제별로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5060세대 사회적협동조합이자 사회적기업인 조직의 이사장 세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분들은 지역과 각자의 자리에서 신망이 두텁고 그 영역의 사회적경제 대표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1내가 교육지원청에서 학부모지원전문가로 하는 일은 대부분 학부모들의 ‘소통’을 돕는 거다. ‘수다방’, ‘사랑방’, ‘학습공동체’, ‘워크숍’, ‘사람책’ 등, 때에 따라 다른 이름과 형태로 기획한다. 이 모든 자리는 ‘잘 소통해서 서로 배우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만남’이자 ‘통로’이자 ‘장치’다.오랫동안 교육지원청에서 학부모들을 초대한 자리는 일방적이고 권위적이었다. 학교를 통해 몇몇 학부모들에게만 정보가 전해졌고, 불려온 학부모들은 등록부에 사인을 하고난 뒤 권위있는(?) 강사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자리를 뜨
괜찮은 줄 알았다. 덕산 같은 시골에 짱박혀 사는 일상 말이다. 학기말로 바쁜 학교 일하랴, 틈틈이 술 마시러 다니랴, 주말이면 늦잠 자고 집안일 하랴. 정신없이 굴러가는 내 하루, 일주일, 한 달이 무척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도시 공기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다.두 달 만에 덕산을 떠나 충주 시내에 갔다. 특별한 걸 한 것도 아니었다. 떡볶이 체인점에서 국물떡볶이를 사 먹고, 후식으로 티라미수와 커피를 먹은 뒤, 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오가는 공원을 걸었을 뿐이다. 문득 도시에서 누렸던 자유가 새삼스럽게 다가왔
2017년 6월 6일, 서울을 떠나 목포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3년, 서울 밖 더 나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과 쉬어도 실패해도 괜찮은 작은 사회를 만드는 을 지방 소도시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스타트업으로서 '성공'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공, 기업, 투자자, 개인 그 누구도 처음부터 이곳에서 하는 일을 '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본도 없고 어떤 지역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그 편견들을 묵묵히 아직까지 받아내고 있다. 사람들이 "그것 봐, 그럴 줄 알았
코로나19로 인한 고강도 사회적 거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지나가는 유행이거나 몇몇 국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아닌, 펜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에 다달아서 세계가 잠시 멈춰서 있다. 10년을 넘게 사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공동대표 두 명을 제외하고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 전원이 휴직을 했다. 과연 언제쯤 정상화가 될지 짐작할 수 없다. 9일 고용노동부는 휴업수당을 받고 휴직 중인 근로자가 8일 기준 43만 8233명이며, 지난달 11일 10만 명을 넘어선 이후 20여 일만에 네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버티고
옥천을 떠났다. 지난해 10월 직장을 그만둔 뒤 다른 지역에 새로운 일을 구했다. 전세 계약을 한 지 얼마 안 된 집이 아깝고, 옥천에서 만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고, 익숙한 단골 국밥집과 미용실, 카페가 멀어지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때라고 생각했고, 이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기회는 다른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옥천읍보다 훨씬 적은 인구가 사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으로 이주했다. 월악산 자락에 위치한 덕산면은 옥천보다 춥고, 작고, 좁을 것이었다. 내가 취직한 곳이 학창시절을 보
서울을 떠나 지방(전라남도 목포)에서 살면서 스타트업 만들고 운영한 지 3년이 지났다. 서울을 떠나 조금 더 여유를 찾고 돈을 서울과 비슷하거나 더 벌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엑싯(투자 회수)도 하고 싶었다. 지방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역량만 있으면 돈과 무관하게 일을 하는 지역은 의미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믿었다.전라남도 목포에서 지내는 3년 사이 우울증과 함께 지하철만 보면 가슴이 뛰고 한강만 보면 끌어당기는 것 같은 마음은 사라지고 여유를 찾았다. 아쉽게도 돈은 갈 길이 멀다. 시작하고 거의 반년을 받지 못
옥천에 사는 기자, 번역가, 인권 활동가, 직장인, 생활인이 모인 독서 모임을 나는 ‘시스터 후드’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옥천 언니들 독서 모임’이라고 부른다. 2019년 3월 즈음 “어려운 책, 책장에 꽂아 놓고 혼자는 안 읽는 책,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책을 함께 읽어보자”는 제안으로 시작한 독서모임에 동네 ‘언니들’이 모였다. 그동안 여러 독서 모임을 해봤지만 격주에 한 번, 9개월 동안 총 7권의 책을 읽을 만큼 활발한 모임은 내게 처음이었다. 매번 다른 음식과 술,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각자 살아온 삶과 고민이 조
말에 웃고 말에 운다. 말에 울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고 싶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첫 책이 나오고 얼마 안 됐을 무렵이다. 여행하며 글을 쓰는 일이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사는 일이기도 하다가 누군가에겐 현실 감각 없이 돌아 다니는 한심스러운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집안이 여유로워 저런 걸 거야.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말은 견딜만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거냐며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는 친척의 말. 우리 집 형편을 아는 사람이 건네는 말은 견디기 힘들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
“엄마, 어느 고등학교를 갈지 고민이야.”아직 중학교 2학년인 큰 아이, 벌써(?) 진학이 고민인가 보다.누가 들으면 선택할 고등학교가 무척 많은가보다 하겠지만, 사실 인구 4만명(인구 4만명이라는 규모는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나고 자란 서울 강서구 발산제1동 인구와 맞먹는 수준의 것이다)도 채 되지 않는 함양군에서 갈 수 있는 학교는 몇 되지 않는다.우선 함양읍내에 소위 인문계와 실업계 고등학교가 각 1개씩 있다. 차로 2~30분 떨어진 면 지역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1개 더 있고, 더 골짜기로 들어가면 다른 면 지역에도 고등학교가
은아.나는 지금 옥천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네가 지난여름 놀러 왔던 우리집 말이야. 우리는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숨도 못 쉬게 더운 밤을 보내고, 다음 날 금강에 놀러가 손가락이 쭈글쭈글해질 만큼 오래 물놀이를 했지. 너희가 아름다운 옥천의 여름에 감탄할 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 서울에서, 경기도에서, 아무튼 옥천보다 인구가 몇 십 배는 많고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온 너희에게 꽤 그럴듯한 여름휴가를 만들어주고 싶었거든. 정신없이 즐거운 여행이 끝나고, 무궁화호에 오른 너희를 배웅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오래 전부터 귀촌(지역살이)에 대한 막연한 꿈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느리고 조용히 사는 꿈. 어린 시절 부산에 잠깐 살았던 기억 때문인지, 순천이나 강릉 아니면 제주도 같은 바다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었다. 대도시의 속도와 밀도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인파에 떠밀려 사는 느낌이랄까.2014년 초 드디어 귀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바다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완주에서 협동조합을 운영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커뮤니티비즈니스와 로컬푸드로 유명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어느덧 고향으로 돌아온 지 4년 차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다닌 직장에서 4년 차가 되었을 때 퇴사를 했으니 꼭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1년도 못 버티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줄 알았던 동료들은 여전히 강릉에 살고 있는 필자를 신기해한다. 필자 역시 가끔 놀라곤 한다. 지난 4년은 고향에서 프리랜서로 고군분투한 시간이기도 했다. 비정규직으로 2년. 정규직으로 4년.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서기 이전에 두 가지를 다 경험해보아서인지 그 길을 택하는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해진 틀에 갇히는 걸 몹시 답답해하는 성향인 걸 스스로 명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