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가 잘되는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점심 식사 시간, 분주한 주방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주문받고 진두지휘하는 헤드 셰프 아래 담당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들은 기본 재료를 가지고 짧은 시간 안에 요리해 접시에 담아낸다. 사용한 그릇은 싱크대로 바로바로 보낸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새 요리 도구와 접시를 가지고 다른 요리를 한다. 각자 맡은 음식을 능숙하고 빠르게 요리해내기에 영업도 무리 없이 끝난다.

표면에 보이는 주방의 모습은 대강 이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등 여러 매체에 노출된 모습을 통해 각 파트 담당 요리사들이 무리 없이 신속하게 요리하도록 돕는 담당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재료를 칼질해 손질하는 준비 담당, 요리 도구를 설거지하는 설거지 담당 등이다. 비록 이들이 음식을 굽거나 끓이고 간을 맞추지는 않지만, 이들이 없는 레스토랑의 주방은 시간 내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될 걸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실험에도 이런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필자가 연구하는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자. 실험에 매일 사용하는 비커, 플라스크, 파이펫 팁 등의 도구는 항상 깨끗하게 설거지해 은박지로 적절히 포장하고 고온 멸균기로 살균해 오븐에 바짝 건조해야 한다. 실험에 필요한 시약도 미리 만들어야 하고, 고온에서 멸균해야 한다. 심지어 실험에 사용하는 물조차 3차 증류수를 받아 고온 멸균기에 멸균한 뒤 식혀 놓아야 한다. 이런 준비가 돼 있어야 실험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 사용한 실험 도구는 다음 실험을 위해 앞에서 말한 설거지, 살균, 건조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이런 준비 과정은 보통 실험 과정에 포함되지 않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을 때 오염 등의 변수로 인해 실험을 망칠 수도 있기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고급 레스토랑 주방의 준비 담당, 설거지 담당처럼 해외 유수의 연구소들에는 시약 준비 담당, 실험 도구 세척 및 멸균 담당이 있다. 이런 담당을 하는 공간을 보통 '미디어 키친(media kitchen: media는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배지를 의미하므로 직역을 하자면 배지 만드는 주방이다)' 이라고 통칭한다. 미디어 키친은 대부분 연구소의 중앙 관리 시스템(core facility)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필수 시설로 여겨진다. 미디어 키친에서는 각 연구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플라스크, 비커, 메스실린더, 팁 등 유리와 플라스틱 실험 도구를 세척, 멸균 소독, 건조하여 제공하고, 고압 멸균 3차 증류수, 각종 시약을 만들어 연구자가 자유롭게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한다. 연구자들은 이런 시설에서 제공되는 기본 재료를 바탕으로 실험 결과를 빨리 얻어내고 다음 실험을 설계한다.

비엔나 바이오 센터 내 미디어 키친의 시약 제조 공간. 시약 제조를 하는 동안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닐 커튼으로 공간이 분리돼있다./사진=이지현 분자유전학 박사
비엔나 바이오 센터 내 미디어 키친의 시약 제조 공간. 시약 제조를 하는 동안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닐 커튼으로 공간이 분리돼있다./사진=이지현 분자유전학 박사

요리 재료를 계속 손질하다 보면 그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고 속도가 늘듯, 담당 인력들이 실험 도구를 세척, 소독하고 시약을 꾸준히 만들어 내는 미디어 키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문화가 된다. 필자는 최근 근무하는 연구소의 미디어 키친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가 한국에서 박사 과정생으로 연구할 때는 실험 도구들의 세척과 멸균, 필요 시약 제조를 모두 연구자 스스로 했기 때문에 현 연구소의 미디어 키친을 둘러보기 전까지 근무자들이 대량의 실험 도구들을 각각 세척하고 멸균하고 시약 제조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미 15년의 노하우를 축적한 미디어 키친은 필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용한 실험 도구들이 들어오고 세척되는 공간과 멸균이 끝난 깨끗한 실험 도구들이 포장되는 공간은 철저히 분리되어 오염이 차단되고 있었고, 실험 도구의 마지막 헹굼 물은 3차 증류수로 이루어지도록 방 벽면에는 3차 증류수가 흐르는 관이 모든 세척기에 연결돼있었다. 사람의 손이 필요한 소수의 작업 이외에는 배지 부어주는 기계 등 자동화된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도 했다. 단 6명의 인력이 55개 실험실에서 나오는 실험 도구들을 세척하고, 인당 하루 50L에 가까운 시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근간은 오래 축적된 노하우와 잘 갖추어진 시스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위스 바젤 대학교 미디어 키친. 담당자들이 실험 도구를 세척하거나 운반하고 팁을 꽂는 모습이다./사진=바젤대학교(University of Basel)
스위스 바젤 대학교 미디어 키친. 담당자들이 실험 도구를 세척하거나 운반하고 팁을 꽂는 모습이다./사진=바젤대학교(University of Basel)

한국은 어떨까? 대부분의 한국 연구소 및 대학에는 중앙에서 관리되는 미디어 키친이나 멸균 소독실이 없다. 한국에서 최고 수준으로 여겨지는 연구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렇다 보니 각 실험실에서는 실험 도구 세척과 멸균, 몇몇 시약 제조를 담당하는 최소 인력을 고용하거나, 회사에서 기본적인 용액, 멸균된 팁 등을 구매해 쓰는가 하면, 최악의 상황에는 연구원들 각자가 실험 도구의 세척 및 고압멸균, 시약 제조를 직접 하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비효율과 낭비가 발생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시약 및 재료 구매에 큰 비용을 쓰게 된다는 점, 세척이 가능한 유리 용기 대신 회사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구매해 사용함으로써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게 되어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 각 시약이 실험자 개개인에 의해 만들어지다 보니 시약의 품질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점, 연구자가 실제 실험 이외에 실험 준비 단계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한다는 점 등이 있다. 반면에 중앙 관리 시스템에 미디어 키친이 있으면 앞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냄과 동시에 고용 창출 효과도 얻어낼 수 있다.

한국의 연구소와 대학 실험실에서도 세계적으로 견줄만한 연구 성과가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 10년 후, 혹은 그 이후까지 한국의 과학이 더 발전하고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미디어 키친과 같은 선진화 된 연구 제반 환경의 마련이 하루빨리 논의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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