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새는 송수관(Leaky pipeline)'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의 약자의 조합)'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소수 집단이 교육과 커리어의 각 단계마다 점진적으로 분야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이르는 은유적 표현이다. 여성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필자가 연구하는 생명, 의학 분야에서도 여전히 물이 새는 송수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019년 NEJM(의학 저널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지)에 실린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25년간 40%가 넘는 의과대학 학생들이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5년 전 학생들이 시니어의 나이에 이른 현재까지도 미국의 의과대학 학장들 중 여성의 비율은 20%에 미치지 못한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2020년 자료에 의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25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책임급 여성 인력은 전체 책임급 인력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양권을 중심으로 유색 인종, 성 소수자와 같은 소수 집단이 겪는 물이 새는 송수관 현상도 최근 함께 논의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마저 부족한 실정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문제다. 일과 삶의 균형이 지켜지기 어려운 무한 경쟁의 환경에서 아이를 가진 부모, 특히 여성들은 물리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된다. 때문에 커리어를 이어가는 데에 더 많은 부담을 느낀다. 여성과 소수 집단에게는 커리어 단계마다 적절한 조언을 구하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멘토십, 스폰서십, 네트워킹 기회가 적다. 여성과 소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사업들과 위원회 등등에서 행정 업무를 많이 하는 반면,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리더로의 승진이나 각종 상의 수여, 연구비 수주에서는 여전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 

심사자나 결정권자의 대다수가 아직도 남성인 환경에서 여성이나 소수 집단에 대한 암묵적인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여러 장애물들은 여성과 소수 집단이 학계에서 커리어를 지속해 가고 높은 직위로 올라가기 어렵게 하는 ‘물 샐 구멍’으로 존재한다.

여성/소수 집단에서의 리더가 부족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제대로 된 본보기가 없으니 여성/소수 집단의 젊은 과학자들이 성공한 과학자로 살아남기가 더 어렵고 힘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세계적인 과학자로 인정받은 여성 과학자들이 몇몇 있다. 하지만 종종 매체들에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이 조명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삶의 궤적은 주변의 도움 없이는 이루지 못했을 특수한 경우가 많다. 이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며 여성 과학자로 성공을 이뤄 내기는 더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게다가 이런 과학자들 중 후배 여성 과학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드물다. 아쉬운 현실이지만, 이들에게 목소리를 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소수에게 모든 여성/소수 집단을 대변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리더는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리더를 마냥 기다릴 수 만도 없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한다. 필자의 연구소 내에서는 최근 'EDI 세미나'가 열렸다. EDI(혹은 DEI라고도 부른다)란 형평성(Equity), 다양성(Diversity), 포용성(Inclusion)을 의미하며, 이 세미나를 개최한 EDI 이니셔티브는 연구소 내 여성 박사 후 연구원과 박사 과정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활동이다. 처음에는 EDI에 관심있는 구성원들이 모임을 하며 연구소 내의 환경을 더 여성, 소수 집단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한 의견을 교환했다. 활동을 공식화 하기 위해 연구소 내 트레이닝 팀에 이야기 하면서 연구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세미나 개최, 원탁 회의 등이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원탁 회의에서는 여성/소수 집단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소외된 이를 위한 연대(Allyship)’, ‘물 새는 송수관(leaky pipeline)’, ‘멘토링(Mentoring)’,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팀(team)’, ‘육아(parenthood)’, ‘네트워킹과 협상(Networking and negotiation)’ 이라는 주제 아래 논의됐다. 이는 곧 정리돼 연구소 전체 구성원들에게 전달될 예정이고, 연구소 회의에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EDI 세미나에 초대된 연사, 카라 맥킨리 (Kara McKinley)는 여성과 소수 집단의 연구자들을 위한 단체, ‘리딩엣지 심포지엄(Leading Edge Symposium)’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교수가 되고 연구비를 수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바탕으로 여성과 소수 집단이 이너서클에 속하지 못해 겪는 소외감과 멘토십, 스폰서십, 네트워킹 기회가 부족한 것이 이들이 학계에 남아 교수가 되고 승진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고 인식했다. 그녀는 현실 인식에 그치지 않고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리딩엣지 심포지엄에서는 여성과 소수 집단에 속하는 젋은 연구자들을 매년 선발하고 시니어 멘토들, 여러 연구 기관과 재단의 지원을 받아 심포지엄, 멘토링, 트레이닝, 스폰서십을 제공하여 이들의 학계로의 승진을 돕는다.

Leading Edge Symposium 사이트의 소개 화면 일부. 이 단체는 미국의 생물학계 교수진에 성별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 되었다. 이 단체에는 미국 외에도 전세계 모든 곳의 여성/ 소수 집단에 속한 박사 후 연구원들이 지원을 할 수가 있으며, 심포지엄과 멘토링 등을 통해  교수 임용과 이후 지속을 위한 네트워킹과 트레이닝을 제공한다./출처=리딩 엣지 심포지엄
Leading Edge Symposium 사이트의 소개 화면 일부. 이 단체는 미국의 생물학계 교수진에 성별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 되었다. 이 단체에는 미국 외에도 전세계 모든 곳의 여성/ 소수 집단에 속한 박사 후 연구원들이 지원을 할 수가 있으며, 심포지엄과 멘토링 등을 통해  교수 임용과 이후 지속을 위한 네트워킹과 트레이닝을 제공한다./출처=리딩 엣지 심포지엄

EDI 이니셔티브와 카라 맥킨리의 예는 연구자 하나하나인 우리 각자가 현재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한다. 세계적인 과학자 몇몇이 아니라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우리가 조직의 일원이 되고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뒤따라 오는 후배들에게 하나의 작은 예가 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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