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유럽에 있었을 때, 각 연구소 주최로 그룹리더 후보 세미나(GL candidate seminar)라는 게 종종 열렸다. GL(group leader)이란 각 연구실의 연구책임자를 의미하고, 해당 세미나는 연구소에 새로운 그룹리더를 뽑기 위해 열리는 후보자들의 릴레이 세미나였다. 처음에는 이 세미나가 너무나도 생소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필자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기간 동안 새 교수를 뽑기 위해 세미나가 있을 때 참여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개최된 적이 없었다. 새로운 교수를 뽑는 자리에는 해당 과에 있는 기존의 전임 교원들만 참여하고 비공개로 진행됐다. 한국 대부분 대학과 연구소에서 새로운 교수나 그룹리더를 채용할 때 그 과정은 기존의 교수나 그룹리더만 참여하는 비공개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룹리더 후보 세미나를 위해 연구소에서는 기존의 그룹리더들이 세미나에 초대할 소수 후보자를 추리는 1차 심사를 진행한다. 이후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후보자들에게 약 한 달 전에 채용 심사 세미나 공지와 함께 필요에 따라 후보자들의 비행기, 호텔 등을 조율하며 초청 이메일을 발송한다. 발표자가 정해지면 연구소 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수 주 전부터 세미나가 공지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석사, 박사, 박사후연수라는 쉽지 않은 긴 여정을 지나 마침내 한 연구실의 책임자가 될 기회인 이 세미나에서 후보자들은, 많은 이들이 상상할 수 있듯이 그 어떤 발표보다 칼을 갈고 준비한다.

비록 후보자들에게는 채용 심사 자리라 긴장되고 불편한 자리일 수 있겠지만, 세미나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여느 심포지엄 못지않게 연구에 관한 토론으로 활기를 띤다. 새 그룹리더를 뽑는 자리인 만큼 기존 그룹리더가 모두 참석하고, 대부분의 박사후연구원들과 학생들도 세미나를 듣고 질의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열심히 발표를 준비한 후보자들, 그들을 평가하기 위해 집중하는 그룹리더들, 그 어느 발표보다 수준 높은 발표를 시리즈로 들으며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청중들이 어우러진 이 세미나 시리즈가 다른 심포지엄들과 못지않게 성황리에 치르는 일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세미나가 끝나면 후보자들은 그룹리더만이 참여하는 '분필 토크(Chalk Talk)‘를 해야 한다. 미리 준비된 발표 자료 없이, 말 그대로 분필 하나로 칠판 앞에서 연구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세미나가 각 후보자가 과거에 한 기존의 연구를 발표하는 자리라면, 분필 토크는 각 후보자가 그룹리더로 뽑힌다면 무슨 연구를 할지 그들이 설계한 연구, 즉 미래를 보여주는 자리다. 후보자들은 10~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빈 칠판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 가며 논리를 펼쳐 나간다. 아무런 자료를 보여줄 수 없으므로 후보자 논리의 허점과 지식의 깊이를 잘 파악할 수 있고, 심층적인 질의응답과 때로는 날카로운 공방이 오가는 토론을 통해 각 후보자가 얼마나 새 그룹리더로서 준비됐는지를 여실히 판단할 수 있다. 이 분필 토크에는 각 연구실에 있는 시니어 레벨의 박사후연구원 소수가 신청을 통해 참관인으로 참여할 수 있고, 질문을 할 수는 없지만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들의 가까운 미래에 있을 지원과정을 준비할 수 있는 소중한 배움의 장이 된다.

분필 토크(Chalk Talk)의 예. 정식으로 번역된 한국어 표현은 없다. 그만큼 외국에서는 일반화된 이 개념이 한국에는 낯설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진에서처럼 캐주얼하게 진행되는 분필 토크도 있지만, 채용 심사 과정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게 도는 경우도 있다./출처=Photo credit: Kate Harding and Madhvi Venkatesh. Image copyright.
분필 토크(Chalk Talk)의 예. 정식으로 번역된 한국어 표현은 없다. 그만큼 외국에서는 일반화된 이 개념이 한국에는 낯설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진에서처럼 캐주얼하게 진행되는 분필 토크도 있지만, 채용 심사 과정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게 도는 경우도 있다./출처=Photo credit: Kate Harding and Madhvi Venkatesh. Image copyright.

후보자들은 이후 각 그룹리더와 30분 정도 일대일 개인 면담 시간을 보낸다. 그룹리더 수가 적어도 15명은 되기 때문에 모든 심사 과정은 적어도 1박2일, 후보자가 많으면 2박3일 정도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심사가 끝나는 날 오후에는 연구소에서 파티가 열리고 후보자들과 그룹리더들이 참여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만찬이 이어진다. 집중적인 심사 과정을 치른 후보자들에게 연구소에서 하는 대접의 일종이다. 비록 그룹리더 자리에 지원자 신분으로 온 후보자들이지만, 연구소가 보여 주는 일련의 환영의 제스처들은 이후 그룹리더 최종 후보로 선정된 후보자뿐만 아니라 불합격한 후보자에게까지 연구소에 대해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는 연구소 자체 평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한국의 채용 심사 과정은 유럽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한국에서는 심사 과정이 압축돼있고, 주로 기존 그룹리더·전임교원들만 참여하는 세미나와 질의응답, 개인 면담 정도로 이루어진다. 규모가 작고 과정이 간단한 만큼 심사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 비용이 적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에 비해 필자가 경험한 유럽의 스타일은 연구소에서 긴 시간 준비해야 하고 심사 과정 자체도 길며,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심사 과정을 최대한 오픈해 많은 이들에게 배움과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점은 어쩌면 그 과정에 들어가는 노력과 비용, 시간을 상쇄시킬 만큼의 장점이 되지 않을까. 한국에도 몇몇 연구소나 대학 채용 과정에서 적어도 세미나는 학생들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채용 심사 과정마저 배움과 활발한 토론의 장, 나아가 하나의 즐거운 이벤트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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