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령 바리의꿈 정착지원부장이 부천계남초등학교에서 5~6학년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콩타닥 장독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바리의꿈

사회적기업 인증 3년차, 정부 지원은?곧?종료될 상황이었다. 모체 조직의 지원사업도 종료되어 기댈 곳도 없어졌다. 판매는 이어졌지만 매출은 정체됐다.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1명이 할 일을 3명이 하면서 임금을 나눠 가졌다. 지금 사회적기업 1000곳 중 많은 곳이 겪고 있을 어려움을 2010년 겨울에 사회적기업 바리의꿈도 겪고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 고향마을에 영하 20도를 밑도는 추위가 밀려들었다. 연료와 반찬까지 아껴야 하는 위기가 왔다. 가진 건 메주밖에 없었다. 한국의 유통회사들과 인맥에 구매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요즘 누가 메주를 사서 직접 장을 담겠냐는 답이 왔다. 잇따른 거절에 지쳐갈 무렵, 김윤령 바리의꿈 정착지원 부장한테 한 지인이 조언했다.

“페이스북을 해봐. 메주 얘기 말고 네 얘기, 연해주 고려인 얘기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 사회적기업 바리의꿈은 메주만 7톤을 팔았다. 주문 폭주로 나중엔 깨진 메주까지 팔려나갔다. 다음해엔 8톤, 2012년엔 10톤이 팔렸다. 1톤 트럭 10대가 메주를 싣고 늘어선 모습을 상상해보라. 페이스북에서 한 지인이 김 부장한테 별명을 붙였다. ‘메주공주.’ 바리의꿈과 ‘메주공주’는 페이스북에서 어떻게 소비자의 마음을 얻어냈을까.

러시아 연해주로 자원봉사하러 간 경희대학생들이 고려인 어린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바리의꿈


◇지인의 지인이 만들어준 판매망

페이스북을 시작한 건 김 부장이었다. 처음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유라시아 환경이나 고려인 동포들이 사는 사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지인들과 페이스북 친구가 맺어지자 지인의 지인도 그의 글에 답했다.

“전 원래 교육문화사업하러 연해주에 갔던 사람이었어요. 그전에 한국에선 아이들 인형극 기획하고 독서지도를 했어요. 판매랑은 영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때 연해주 상황이 돈을 못 벌면 굶어 죽겠더라구요. ‘우리 상품은 좋은 것이다, 이것 안하면 우리 죽는다’는 마음으로 고려인 이야기와 메주를 알리기 시작했죠.”

‘얼숲 두레’라는 페이스북 그룹에서 만난 사람한테서 첫 매출이 났다. 서승광 서풍골 대표였다. 서 대표는 “발효 상태가 탁월하다, 잡균 없이 발효됐다”며 메주 500kg을 구매했다. 지인 판매가 지인의 지인 판매로 이어졌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자신이 구매하지 않더라도 구매할 만한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소개했다.

큰 매출이 터졌다. 페이스북에서 만난 염형철 환경연합 사무총장은 환경연합 에코생협의 물품 구매 담당자를 연결해줬다. 바리의꿈 제품은 모두 유기농이지만 국내 산이 아니란 이유로 국내 생협에선 판매되지 못하던 터였는데, 에코생협이 처음으로 받아줬다. 바리의꿈 콩이 유전자변형작물이 아닌(non-GMO) 유기농작물인 덕분이었다.

김 부장은 페이스북에서 교사들도 만났다. 이들은 바른 먹거리, 전통 문화, 역사를 아우르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 그럴 듯했다. 김 부장은 딸과 조카를 불러 머리를 맞댔다. 2011년 사립 유치원 한 곳에서 시작한 전통 장 담그기 ‘콩타닥 장독간’ 교육은 이내 4곳으로 늘었다. 올해 들어선 유치원, 초·중등학교 14곳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메주공주’의 활약상을 보고 김현동 바리의꿈 대표도 페이스북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활약 속에 바리의꿈 매출은 2011년 3억 원대로 올라섰고 2012년에도 같은 수준을 이어갔다. 2013년엔 이로운아침 유기농 두유를 출시하고 경기도 교육청과 민족교육교류사업을 하면서 매출이 5억 원대로 늘었다. 바리의꿈은 이 과정에서 매출보다 더 귀한 걸 얻었다. 연해주 고향마을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아시노프카 공동작업장 의 고려인 생산자들. /사진제공=바리의꿈


◇"우리가 맘에 안 들면 나가라고 해요" 뼛속 깊은 피해의식을 넘어

1937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가 고향을 찾아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 앞에 놓인 건 다 낡아 살 수 없게 된 집과 여름만 되면 침수되는 황무지였다. 그곳에서 동북아평화연대가 2004년 함께 땅을 일구고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2005년엔 고려인들과 함께 청국장을 띄웠다. 그 청국장을 파느라 세운 국내법인이 사회적기업 바리의꿈이었다.

모든 일은 더뎠다. 소련 붕괴 후 세워진 러시아 정부는 아직 연해주에 사는 소수의 고려인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시장 제도는 도입되었지만 문화는 옛 소련 그대로였다. 재고가 없으면 팔지 않았다. 구할 수 없는 물품도 많았다. 페인트 몇 통, 시멘트 몇 포대 사는 데에 1주일이 걸리기도 했다.

그 사이 고려인들은 맨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지냈다. 집 마련에 시간이 지체되면서 한국에서 온 활동가들한테서 초조한 기색이 느껴지자,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나라가고 하세요. 그래도 돼요. 우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때 김 부장은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스탈린 정부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제정러시아 시절 유배지로 17만1781명이 강제이주됐다. 그 과정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가는 길에서만 2만여 명이 죽었다. 생면부지의 땅에서도 고난은 이어졌다. 정치적 격변기를 맞으면 그들은 다른 터전을 찾아 떠나야 했다. 김 부장은 “그 역사가 DNA에 남은 모양”이라 했다.

‘DNA’를 바꾼 건 바리의꿈 임직원들의 헌신이었다. 9년 동안 이들은 어떤 어려움에도 연해주 고려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창 어려울 땐 김 대표의 딸, 김 부장의 딸까지 연해주에 가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김 대표가 ‘민족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입국 허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된 후엔 부인인 주인영 동북아평화기금 이사장이 연해주를 챙겼다. 이걸 보며 고려인들은 차츰 마음을 열었다.

고려인들과 함께 어려운 고비를 넘으면서 김 대표는 “한국의 소비자한테서 희망을 찾았다”고 말했다. 유기농 인증이 없던 시절에도 소비자는 연해주 이야기를 듣고 지갑을 열어줬다. 김 대표는 “두 번의 금융위기로 국내에선 돈 안 되는 사업에는 돈이 오지 않는다”며 “윤리적 생산의 토대는 안 좋아졌지만 윤리적 가치의 내용으로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살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사회적기업 바리의 꿈 김현동 대표(왼쪽), 신명섭 이사가 연해주 유기농콩으로 제조된 이로운아침 유기농두유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두유에 이은 콩국수, 두부까지...콩사업자협동조합 출범

올 여름 바리의꿈은 콩사업자협동조합을 결성한다. 유기농콩으로 노동자협동조합 해비브릿지는 콩국수를, 사회적기업 이로운넷과 친환경급식업체 푸르나이는 두유를, 식품전문커머스 쿠키쇼핑은 두부를 만들어 팔 예정이다.

신명섭 바리의꿈 이사는 "판매력 있는 사업자들이 모이면 연해주 생산 기반이 더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이 시도가 성공하면 지금 연해주 고향마을을 뛰어다니고 있는 고려인 아이들은 어쩌면 '한국에 유학가고 싶다'는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해주의 선물 청국장과 된장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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