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 머니투데이 임성균 기자 tjdrbs23@
개그맨 정찬우 씨가 11일 한 케이블방송프로그램에서 아버지가 아사(餓死)한 사연을 이야기해 사람들의 놀라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사 더 보기
사고로 뇌를 다쳤던 그의 아버지는 6세 아이의 지능으로 집을 나섰다가 그리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정찬우 씨는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을 가진 개그맨이 다른 사람들한테 흔치 않은 사연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고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봤던, 어쩌면 정찬우 아버지 같은 분들을 외면했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이로운닷넷이 자리 잡은 서울시 합정동에는 낮에 홀로 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한 백발의 할머니가 지팡이에 몸의 의지한 채 음식물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낮이었고, 바로 앞에서는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다 드리고 댁이 어디냐 여쭸습니다.
이가 없어 할머니의 발음은 불분명했습니다. 어쩌면 댁을 알려주시기가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겨울 날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회사 1층 편의점 난간에 기대어 서 계셨습니다.
힘들어 보였지만, 노숙인 같지는 않았습니다.
외부 손님과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 할아버지를 다시 봤습니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계셨습니다.
편의점에서 20여미터 거리. 1시간 동안 할아버지가 걸어온 거리였습니다.
할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자 "배고파"라고 했습니다.

요즘 모든 정당이 '복지'를 국민과의 약속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한국의 복지는 중국, 인도 같은 다른 아시아 나라에 비하면 최저 수준은 아닙니다.
한국은 문명국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최저생계비 이하 가구에는 기초생활수급비가 주어집니다. (수급자 선정기준 더 보기 )
지역마다 사회복지관 (지역별 사회복지관 보기 )이나 무료급식소도 있습니다.
하다 못해 동네 교회나 절에 가면 공짜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긴급복지 지원을 보건복지콜센터, 국번없이 129로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까요?

청주시의 로컬푸드?사회적기업 올리의 이혜정 대표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영국 BBC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대도시, 소도시, 시골 마을의 길가에 실험자가 쓰러져 있게 했습니다.
대도시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소도시에선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아는 척했습니다.
시골의 사람들은 쓰러진 사람들 주변으로 모여들어 '이 사람을 어찌 해야 할까'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혜정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도시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 아닙니다. 관계가 필요합니다.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나라보다 가까운 건 이웃입니다.
돈보다 먼저 건네야 하는 건 관심입니다.
'관심' 있는 이웃이 있었다면, 그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에게 말을 건다는 건, 먼 미래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행위입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혹은 편의점의 천몇백원짜리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는 우리 후배들의 미래에 말을 거는 행위이기도 할 것입니다.

[머니위크 칼럼]?문명국에서 굶주린다는 것?

"아무런 맛도 없었다. 뼈다귀에서는 썩은 피의 숨이 막힐 듯한 냄새가 나서 곧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또 뜯어 먹어보았다. 게우지만 않으면 무슨 효험이 있겠지. 요는 배를 달래두는 것이었다. (소설 <굶주림> 중)"

121년 전 소설을 읽었다. '크누트 함순'이란 노르웨이 작가가 쓴 <굶주림>이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서 읽은 건 아니다. 연초에 들었던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굶주림'에 대한 무지를 깨닫게 했다. 끼니를 거른 적은 있어도 굶주린 적은 없는 자로서, 도대체 어떤 상태가 굶주림인지 알고 싶었다.

기이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분명 굶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거지 노인이 구걸하자 마지막 남은 양복 조끼를 전당포에 맡겨 돈 몇푼을 나눠준다. 자신에게 연정을 품었던 여인이 보내준 돈을 여인숙 주인에게 던지듯 줘버린다. 집에 개한테 먹이려한다며 썩어가는 뼈다귀를 얻어다가 남몰래 뜯어먹는다. 팔리지 않는 글을 쓰면서도 도통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는 구걸하지 않을까. 도둑질을 하지 못할까. 글을 포기하지 못할까. 아마 그의 '굶주림'은 저개발국 절대빈곤에서 오는 굶주림과는 좀 다른가 보다. 오히려 노량진이나 신림동 고시촌 청년들의 굶주림과 비슷해 보인다.

고시학원과 고시원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사는 청년들에게 '밥'은 '배를 달래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000원짜리 편의점 김밥이든, 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2000원짜리 김치볶음밥이든 상관없다. 하루 한끼만 먹어도 괜찮다고 한다. 꿈 때문이다. 경찰, 승무원, 공무원, 교사, 검사 등등 제각각 이루고 싶은 건 다르지만 나중에 그걸 하고 싶으니 지금은 상관없다고 여긴다.

아는 의사들한테 그 이야기를 전하니 안타까워한다. 생산한지 오래된 식재료에 각종 첨가제를 넣어 맛을 낸 김밥이나 볶음밥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은 거의 없고 칼로리만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신선한 음식을 제대로 못 먹으면 나이 들어서 당뇨, 혈관질환 같은 온갖 성인병에 시달릴 위험이 높아진단다.

한국전쟁 세대 중 어릴 적 굶주림을 자주 겪은 사람은 노인기에 당뇨병 발병률이 높더라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스웨덴에서도 과거 굶주림이 극심했던 지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이 나중에 고혈압, 출혈성 뇌졸중에 걸리는 확률이 높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단다.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못하는 건 배를 채우는 것일 뿐, 필요영양은 굶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얘기를 취업준비생들한테 들려주면 뭐할 것인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위해 돈 벌러 가라고 할 것인가. 소설 '굶주림'의 주인공은 결국 굶주림으로부터 도망치듯 외항선에 보조선원으로 올라탄다. 지금으로 치면 편의점 아르바이트 같은 비정규직 일이다.

문명 이전에 사람들은 굶주림을 일으키는 자연과 싸웠다. 그러다가 각종 농기구와 비료 만드는 법, 가축 키우는 법을 발전시켰다. 흙 한번 만져본 적 없는 이도 돈으로 밥을 사먹는 문명국가, 자본사회에선 문명이, 자본이, 사회가 우리의 '자연'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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