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 CGV에 걸린 이승만 재평가 선전물 '건국전쟁'의 포스터 / 사진 = 뉴시스
서울 영등포 CGV에 걸린 이승만 재평가 선전물 '건국전쟁'의 포스터 / 사진 = 뉴시스

이로운넷 = 이화종 기자

우파 고령층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 생애를 다룬 선전물 <건국전쟁> 띄우기가 한창이다. 이런 흐름에 편승해 4.10총선에 나서는 창원지역 국민의힘 예비후보들도 관람 인증과 후기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등 보수 유권자 공략에 나서고 있다.

20일 마산지역 국민의힘 예비 후보들의 건국전쟁 관련 반응을 종합하면 대체로 이승만을 재평가 하고 과대신 공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기고 있다.

최형두(창원 마산합포·국민의힘) 국회의원은 공식 블로그에 <건국전쟁> 관람을 독려하며 "3.15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공7 과3의 평가 이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고 적었다.

김영선(창원 의창·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진정 국민을 생각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를 바로 알고 역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하겠다"고 SNS에 관람 후기를 올렸다.

김수영 국민의힘 창원 마산합포 예비후보는 "좌익 좌파들의 거짓 선동과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며 "이승만 대통령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민 국민의힘 창원 의창 예비후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칭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배철순 창원 의창 예비후보, 박춘덕 창원 진해 예비후보도 SNS 등에 <건국전쟁> 관람 인증과 후기를 올렸다.

이승만의 폭거에 희생당한 시민들의 유족과 후손들에게 '이승만 재평가'를 앞세우며 표를 호소하는 모습이 황당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하다.

◆ 4·19 혁명 희생자 유족들의 반응···"형님은 머리에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는데..."

경남도민일보는 지난 16일 '민주성지'인 창원시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에 국가 폭력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유족들의 발언을 인용해 보도했다.

김 사무국장은 "형님은 3.15의거 때 시위에 나갔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비참하게 돌아가셨다"라며 "그런 형님이 지금 상황을 보신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분개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3.15의거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끝내고자 민중이 항거한 의거"라며 "그 과정에서 10명이 넘는 학생이 사망했고 이어진 4.19혁명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부연했다.

김 사무국장은 창원에서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투철한 역사의식을 주문했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다 이뤄졌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띄우는지 모르겠다"라며 "보수 상징이 꼭 이승만이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인물이 그렇게 없나 싶다"라고 지적했다.

◆ 한반도 전쟁 학살 피해 유족들···"이승만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 한평생 반감 품었는데..."

4·19혁명 이전 한반도전쟁(6·25동란)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도 ‘이승만 재평가’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2살 때 아버지를 잃은 정용문(75·창원시 마산합포구) 씨는 <건국전쟁>을 보러 가자는 지인들의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면서 “저한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며 “한평생을 그 사람에게 반감을 품고 살았고 여전히 이름 석 자 떠올리는 것도 싫다”고 토로했다.

정 씨는 아버지를 여의고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지낸 적이 없다면서 “어머니도 말로 다 못할 만큼 고생했고 나도 연좌제 때문에 변변한 직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평생 밑바닥에서 살았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 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지역에 아직 살고 있는데 그 지역 국회의원 후보라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익만 좇아 너무 손쉽게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 씨의 부친 故(고)정성화 씨는 지난달 17일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제1형사부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고 피고인들의 명예가 복원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 1·2차 마산 의거···자유당의 부정선거와 부패정치인들의 철새행각이 원인

1960년 3월 15일에 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3·15마산 의거당시 실종됐던 김주열 열사가 4월 11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격분한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사건이 4·11 제2차 마산의거다. 이 항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던 허윤수 의원이 1960년 3·15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자 노골적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에 시민들의 분노가 커져 있는 상태였다.

3·15부정선거는 마산에서도 발생했는데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직후인 오전 10시30분경 부정선거를 비판하면서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이어 오후부터 마산의 민주당원과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가 시작됐다.

격렬한 저항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경찰이 시민들에게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민주화운동사전에 따르면 김주열 열사는 남선전기 마산지점 앞에서 최루탄에 직격당해 절명했는데 최루탄이 눈에 박힌 끔직한 주검을 발견한 경찰이 시신을 유기해 버렸다.

손석례 당시 마산경찰서장이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김덕모에게 지시해 김 열사의 시신을 마산항 제1부두로 이송하고 박종표 등이 철사로 시신에 돌을 묶어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다.

김 열사의 시신이 1960년 4월 11일에 인양되면서 최루탄이 눈을 관통해 후두부까지 관통한 처참한 모습이 공개됐다. 

이 소식을 접한 마산 시민들은 4·11 2차 마산의거를 일으켰으며 김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아들을 잃은 고통에 공감한 여성들이 대거 참여해 "죽은 자식 내놓아라" "나도 죽여 달라"라는 함성이 일었다.

전북 남원 출신인 김주열 열사는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진학을 위해 친형과 마산의 친척 집에 머무르다가 3·15의거에 참여했으나 실종되면서 아들을 찾기 위해 마산으로 달려온 어머니 권 여사의 사연이 마산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상황이었다.

두 항거가 부정부패와 철새행각이 원인이었다는 점이 잡다한 총선용 정당이 난립하고 디올백 이야기가 나오는 현재와 너무 겹쳐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 무차별적 폭력 진압에 이어 시민들에게 용공조작을 시도한 이승만 정권

2차의거가 경찰의 진압에도 이어지자 용공조작이 시도 되기도 했다. 

4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무부장관 홍진기는 4·11 제2차 마산 의거 관련 "마산은 조봉암 표가 제일 많이 나온 곳이고, 공산당원이 많았던 곳이며, 남해안의 밀수 근거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2차 데모 시에도 4월 11일 밤 10시 30분, 이북 방송에 이미 관련 소식이 나오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공산당의 사주가 있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라고 부연했다.

4월 14일 치안국장 조인구는 '제2마산사건'에 "불순 세력의 편승이 엿보이며 시위 주모자를 색출할 것"이라 천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라고 언급하며 "공산당과 싸워서 100만 명 이상의 우리 동포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정치욕 만으로 이런 일을 또 만들었으니 우리 정부나 민간에서는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라고 용공조작에 힘을 실었다.

같은 날 민주당은 마산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4.11제2차마산의거는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한 부정선거가 그 원인이며, 공산당이 개입한 정황은 없다"라고 못박았다.

17일 국회특별조사위원회가 심문한 한옥신 부장 검사는 "마산사건에 오열(五列, 간첩)이 개재된 여부는 속단을 불허하며 객관적인 파괴 양상만으로 원인을 규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특별조사위원회와 대한변협 마산조사단은 조사를 종료하고 19일 "마산 사건의 원인은 자유당 마산시당 분규 및 여당관리들의 부패상"이라면서 "제1차 사건의 원인은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라고 합의했다.

2차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1차 사건 당시의 발포 경찰관 및 고문 경찰관에 대한 원한이 김주열 군의 비참한 시체의 표류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당시 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은 이 사건이 공산당이나 오열(五列)의 사주가 없다는 점과 박종표 경위가 당시 중학교 졸업반인 소년 김주열을 최루탄으로 사살했으며 경찰 주도로 바다에 시신이 유기됐다는 점이다.

또한 선거 전에 이미 치안국에서 일선 경찰서로 배급했으며 1차 항거 당시 경찰이 무차별 발사와 연행한 시민에 대한 고문을 했다는 점과 고문 경찰관에 대한 구속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부정선거에 대한 반감을 진압할 계획도 당시 이승만 정권이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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