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출처=위키백과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출처=위키백과

통제할 수 없는 적대감으로 돌아온 이슬람의 분노를 분석한 책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저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정당은 일종의 ‘분노은행’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정당에 맡겼고, 정당들은 사람들의 예금을 관리하고 키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정당은 정치에서 예금주의 감정을 무엇보다 우선에 두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일에 몰두합니다. 

‘정당은 곧 감정은행’이라는 페터의 통찰을 우리는 현실의 정치인의 언어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지금처럼 집권당과 야당, 그리고 대통령의 말을 통해 그려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분열되어 투영된 적이 있을까요? 그들이 내뱉는 말은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야유, 모욕주기에 덧붙인 자기중심적인 수사 뿐, 국가의 비전과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하며 공동 행동을 하자는 입에 발린 말마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서로가 상대당 정치인이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듣는 모두는 말하는 사람이 위선자임을 아는데, 말하는 이는 ‘나만 빼고’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이 주장이 통하지 않으면 칼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자기와 소속당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아무런 논거도 없이 비난합니다. 그럴 때 이들이 쓰는 언어는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분열된 ‘불멸의 틈’을 헤집어 벌리는데 특화된 말들입니다. 

이견을 야유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이적시 하는 것이 국민들의 삶을 내부로부터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들 모두가 깨달아야 합니다.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 정치인의 언어가 적대와 분열을 증폭시키는 기폭제일 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됩니다. 지금 우리 정치의 모습은 정략적으로 금기시된 정치 발언들을 마구잡이로 배출하여 국민들을 ‘사회적 홈리스’ 상태에서 ‘감정적 홈리스’상태로 몰아가는 이전투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입장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근거 없는 증오를 천박한 언어로 부끄러움 없이 공개된 공간에서 배출합니다. 각 당은 갈등을 조정하려는 토론에 상대방 제압과 모욕에 능란한 정치인이나 전문가를 내보내 증오를 대리로 발산하고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이들은 ‘배타적 우리’를 원하는 제 진영의 지지자들로부터 커다란 환호와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말은, 특히 정치인의 말은, 내용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본인이 기존에 했던 말과 상반되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서도 그 모순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요즘 정치인의 덕목이 된 듯 합니다. 그리고 말은 듣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앙다문 입과 굳은 표정, 화난 얼굴로 상대당에게 가장 모욕이 될 듯한 말들만을 골라 최대한 비난하고 욕보이는 장면을 반복해서 봐야 하는 역겨움과 부끄러움은 존중을 받지 못하는 국민의 몫입니다.  

지금, 정치인의 말에 가치가 있고,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쓸모가 있고 힘이 있는 말은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를 향한 ‘가능의 공간’을 확대합니다. 그 말을 들음으로써 다시 생각하고,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다른 가능성을 쳐다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그런 힘이 없습니다. 소수 지지자에 대한 효과는 거두지만 다수의 냉소를 자아내어 ‘가능의 공간’을 스스로 닫아 버립니다. 

정치인의 말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공산전체주의’를 추종한다는 진보이건, ‘공산전체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보수이건 간에, 목표가 있는 망상증과 정치적 열기가 결합하면 가공할 위력을 갖게 됩니다. 대한민국을 빨간 지역과 파란 지역으로 나누어 국민들의 편견과 공포심을 발판삼아야만 정치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인의 말은 곰곰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은 함축적이고 균형잡혔으며, 증거에 기반한 말입니다. 이는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자기 경험을 바깥에서 볼 줄 알 때 나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끔직한 이유가 함부로 내뱉는 정치인의 말들로 시민들도 편을 나눠 서로 적의를 불태우게 된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고통을 상대방의 언어로 증명해야 하는 상황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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