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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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에 가려진 방송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행본 ‘가장 보통의 드라마’를 쓰기 위해 현장 종사자들을 열심히 만나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고 적정 임금을 받기 위한 그들의 기나긴 역사가 단연 돋보였다. 방송국과 제작사는 사람 쓰는 것조차 ‘자유롭게’ 못하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며 끊임없이 반발했다. 최저임금이든 계약방식이든 개인의 경제적 자율성은 분명 침해됐겠지만, 결국 노동 환경의 변화는 미디어 산업의 체계가 잡히고 기업과 사람이 함께 성장하는 한류의 발판이 되었다. 모든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세계적인 상을 휩쓴 ‘기생충’의 이야기도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필자는 주거와 노동의 영역을 오가며 일하고 있는데, 주거 영역에서 바라보면 노동 영역이 부러운 순간들이 참 많다. 만족스럽진 못하더라도 노동조합이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사용자와 노동자가 공생할 수 있는 제도의 보호가 다양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에 비해 31년 만에 겨우 개정됐으나 고작 31개 조항에 불과한 ‘논란의’ 주택임대차보호법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특히 사유재산 침해라는 이유만으로 지구 반대편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임대차무기계약 등은 입 밖으로 꺼내지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냥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2+2년의 계약갱신청구권 가지고 눈치를 볼 게 아니라, 차라리 '표준임대료' 같은 전향적인 정책을 도입하기 위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상상해보는 거다. 표준임대료란 건축물의 위치·종류·건축 연한 등을 반영해 정책적으로 설정된 임대료의 적정선 혹은 최고가격이다.

자본시장 원리에 반하는 가격 규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표준임대료가 도입되더라도 소유자들은 손해를 보지 않고 적절히 돈을 벌 수 있다. 이미 표준임대료 도입을 위한 예행연습은 진행되고 있다. 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은 시세 95% 이하의 의무 조건이 있는데, 최고가격 규제가 있더라도 반자본주의적이라고 취급받지 않는다. 토지임대부 사회주택도 시세 80% 이하의 가격 정책을 준수하고 있다.

임대료 제한이 있든 없든, 민간임대주택의 상당수는 사업 구조상 주택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계획했던 IRR(내부수익률)을 달성한다. 중간 과정의 임대수익은 이자와 운영비를 감당하는 수준 정도라, 가격이 일부 규제된다고 해서 재정 흐름에 큰 위협이 되진 않는다. 노후를 위해 마련한 생계형 임대주택의 경우 수익이 줄어들 가능성은 있지만, 이미 임대료 수준이 시세보다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마찬가지로 영향이 적다.

제도 도입의 시작은 세금 감면에서부터 할 수 있다. 이미 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은 시세 95% 이하의 임대료를 책정하는 조건으로 각종 혜택을 받고 있다. 표준임대료 수준으로 운영하고 있던 임대주택들은 임대료를 낮추지 않더라도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으니 시장이 호응할 가능성이 높다. 표준임대료 도입 과정에서 민간임대시장의 양성화도 가속할 수 있다.

표준임대료가 말이 되는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떤 표준임대료 체계가 한국의 시장에 잘 맞을지 상상해보자. 지역별로 편차가 크고, 영세 임대주택과 기업형 임대주택의 차이가 확연히 나뉘는 한국 임대시장에 어떤 정책이 가장 효과적일지 판단해보는 거다. 독일처럼 지역별로 임대료 가격에 초점을 맞춰 적정한 수준을 찾을 수도 있겠고, 네덜란드처럼 주택점수제와 임대료연동제를 도입해 주택 품질에 따른 점수별로 임대료 상한선을 정해주는 시스템을 우리 상황에 맞게 도입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비영리 주체들이 나서 사회주택을 공급하고 운영한다는 것, 30세 미만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대상에서 제외하는 복지 시스템이 있음에도 청년들에게 월세를 지원한다는 것, 31년간 방치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된다는 것, 처음엔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일관되게 노력한 사람들 덕분에 하나씩 이뤄나갔다. 표준임대료 역시 조급하지 않게 나아가면 언젠가는 시민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정책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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