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 하다가 여기에서 사회적경제 하려면 답답하지 않아?’’라고 퀘벡 친구가 물었다. 퀘벡 토박이에다가 지역공동체 조직에서 직업 및 경력 상담가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한국의 사회적경제는 열정과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퀘벡은 점점 직장화 되어 간다며, 주정부의 지원도 현장에서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발전하는 만큼 새로운 목표들이 기다리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들은 돌아볼 여유가 없어, 막상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 대한 평가에는 박한 경우가 많다.

지구 반대편, 같은 목소리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다시,빛으로' 유물전시회 / 출처=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시민사회추진위원회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다시,빛으로' 유물전시회 / 출처=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시민사회추진위원회

«협동조직체들을 꼭 구성해야 한다…현대는 각자가 단독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협동하는 법을 지도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소비사회의 착취와 인간의 공포로 인한 파멸이 깊어진다… 협동으로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들자. 이는 실현가능성 없는 소원이 아니다. 우리가 민중교육을 통해 실현할 목표이다.»

첫 번째 인용문은 초대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지내신 지학순 주교님께서 1974년 사목지침으로 하신 말씀 중 일부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1971년 데자르뎅연대경제금고가 창립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앙드레 로렝이 작성한 금고의 사명 중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이념 중 한 귀절이다.

9월 한 달간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의 불씨를 지피신 지학순 주교님의 탄생 100주년 행사인 ‘다시, 빛으로’가 원주에서 열리고 있다. 동시에 퀘벡에서는 퀘벡 사회적경제가 뿌리내리고 성장하기까지 선구자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회적금융조직 데자르뎅연대경제금고가 창립 50주년 기념 자료를 9월 6일에 배포했다.

50여년 세월을 거슬러 한국의 원주와 캐나다의 퀘벡이라는 먼 땅에서 당시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을 두 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저소득봉급생활자 및 하급관리들에 대한 신용조합의 지속적 추진과 강화, 그리고 노동자, 농어민, 영세상인, 빈민 등 일반 민중들을 위한 다양하고 강력한 협동조직활동을 주창하고 독려했던 지학순 주교님. 은행과 사채의 고리대금에 신음하는 퀘벡 민중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가정경제협동조합협의회를 만들어 금융회사들과 투쟁하며 경제금고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앙드레 로렝.

데자르뎅연대경제금고 50주년 기념 자료(과감하게 협동과 연대를 실현하자, 끊임없이 한결같이!) / 출처=데자르뎅연대경제금고 홈페이지
데자르뎅연대경제금고 50주년 기념 자료(과감하게 협동과 연대를 실현하자, 끊임없이 한결같이!) / 출처=데자르뎅연대경제금고 홈페이지

정치사회적 상황이 가른 명암

같은 시기인 1970년대 초, 두 선구자는 민중에 대한 측은지심과 협동조직에 대한 같은 사명을 가졌으나, 이후 두 분의 삶과 두 나라의 사회적경제의 명암은 동일할 수 없었다.

군부독재 아래 지학순 주교님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셔야 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암울한 정치사회 상황은 삶터에서 협동을 일구어가고자 했던 이들을 더 힘들게 했다. 민중 주도의 자주적이고 자치적인 삶을 위한 협동조합은 생협법, 협동조합기본법 등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30, 40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반면, 퀘벡은 1960년대 십년간 일명 무력없이 이루어진 ‘조용한 혁명’이라 일컫는 혁명을 통해 1970년대부터는 정치사회적 안정기로 접어든 시기였다. 107년간의 영국의 식민지배체제를 마치고 1867년 독립했으나 93년여동안 퀘벡의 주요 권력은 영어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조용한 혁명을 거치며, 정치·사회·경제의 주요 권력이 불어권으로 이양되었다. 이 때 정부의 역할 강화로, 수도와 전기 서비스의 공영화, 시민들에게 무료서비스로 각광받는 의료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정치사회적 안정을 이룬 1970년대 이후, 앙드레 로렝과 협동조합 진영은 그들의 사명을 이루는 것에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다시 빛으로, 다시 협동으로

몇 해 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에서 있었던 사회적경제 컨퍼런스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조합을 이루는 한국 생협 사례에 질문을 그치지 않던 200여명 생산자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안정적 판로가 보장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그들은 조직된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에 부러워했다. 지역생산물 소비, 식량자급의 실천으로 퀘벡주에서도 도시농업운동이 활발하나, 여전히 소비자를 조직하는 것은 부족해 보인다.

어려운 정치사회 상황 속에서도 사명감으로 협동을 실천하며 한국의 사회적경제 역사를 이어 온 분들을 생각한다. 이번 추석은 한국의 사회적경제에 몸담고 있는 모든 분들이 각자의 열정에 후한 평가와 자부심으로 따뜻한 빛을 발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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