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 미만 사업장에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이 적용되는 첫날, 영세 자영업자를 비롯한 중소기업·소상공인 업계가 혼란에 빠졌다. 83만7000여개 사업장이 추가로 중대재해법의 적용을 받는데, 이중에는 5인 이상 직원을 고용한 소상공인도 포함된다.

27일 중대재해법이 50인 미만 사업장에 전면 적용된다. 중대재해 발생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소홀히 한 사실이 확인되면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앞서 중대재해법은 전면 도입에 앞서 상시 근로자 50인 미만 중소사업장에 대해 2년간 시행을 유예해왔다.

동대문구 한 아파트 공사 현장 사진= 이로운넷
동대문구 한 아파트 공사 현장 사진= 이로운넷

중소기업계는 그간 중대재해법이 전면 적용될 경우,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세 사업장의 경우 안전관리 시스템이 미비하고, 안전관리자를 추가로 채용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다. 중소기업 대표가 중대재해법으로 처벌받게 될 경우, 정상 경영이 어려워져 근로자가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청 설립'과 '산재예방 예산 2조원 확보' 등의 조건을 두고 여야 간 이견이 계속되면서 유예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중대재해법에 대응할 여력이 없는 중·소상공인 업계는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범법자만 양성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울 강북구에서 요식업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예방을 하고, 직원들 안전 교육도 철저히 하겠지만 일을 하다보면 불가피한 사고가 있을 수 있다. 그때마다 대표가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하면 가게 운영은 어떻게 이뤄지겠나"며 "현장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제조업을 운영하는 이모씨도 "안전 사고를 예방하려면 직원 인식 개선이 먼저인데, 그것보다 처벌이 우선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 더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부족한 현장 인원으로 제조 물량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관리가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입장문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제공)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입장문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제공)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0인 미만 중소기업의 80.0%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준비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시행에 '상당 부분 준비가 됐다'는 응답은 18.8%로 낮게 나타났다. 가장 필요한 정부 지원으로는 '노후설비 개선 등 안전투자 재정 및 세제 지원'이 꼽혔다.

준비가 미흡한 현장에 중대재해법이 전면 적용되면서, 대표가 사실상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줄폐업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타 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 50인 미만 협력업체가 폐업할 경우, 경제계에 미칠 여파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기업계 관계자는 "근로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영세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적용은 안전한 근로환경 조성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처벌보다는 예방에 초점을 맞춰 현장 중소기업이 보다 안전한 근로 환경을 조성할 시간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도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현장에서는 83만7000개 영세·중소기업의 열악한 여건과 부족한 준비 상황,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800만 근로자의 고용과 일자리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개정안을 신속히 처리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해왔다"며 "입법이 좌절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이 장관은 "민주당이 법 시행 열흘 전인 16일에 산안청 제안을 하셨다"며 "역사적 맥락을 보면 2020년 김영주 민주당 의원이 산안청 설립에 관한 법을 발의했는데, 2년 반 동안 충분한 논의도 안 하다 열흘 전에 얘기하는 건 안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그간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2년 연속 두 자릿수로 예산을 증가해 재해 예방 예산을 책정하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며 "끊임없이 (산업안전보건본부의) 예산을 확대하고 능력과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답변 드렸는데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섭섭함을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여야가 법 시행 이후에도 다음 본회의가 예정돼 있는 내달 1일 다시 2년 유예를 연장하는 개정안을 처리할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을 제기하고 있지만, 고용부는 일단 지난해 12월 발표한 지원대책 추진을 서두르겠다는 계획이다.

우선 고용부는 다음 주부터 약 3개월 간을 '산업안전 대진단' 집중 실시기간으로 지정하고 사상 최초로 83만7000개 50인 미만 기업 전체를 대상으로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자체 진단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를 토대로 기업의 중대재해 대응 역량에 따라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컨설팅·교육·기술지도와 시설개선을 포함한 재정지원 등을 할 예정이다. 전국에 산업안전대진단 상담·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하고, 기업에서 요청하는 경우 현장 출동팀에서 직접 방문해 애로사항을 지원해나갈 계획이다.

이 밖에도 관계부처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중대재해 대책 추진단'이 출범하며, 안전보건관리 전문인력 선임에 어려움을 겪는 소규모 기업들을 위해 전문가를 공동으로 선임하는 '공동안전관리전문가 지원사업'도 올해 첫 시행된다.

이 장관은 "현장의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가 최우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50인 미만 기업이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조속히 구축하도록 가용한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라며, "앞서 밝힌 지원 대책에 담긴 내용들을 충실히 이행하되, 이에 그치지 않고 1조5000억원 규모의 지원대책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재정당국과 협의해 기금운용계획 변경 등을 통해 보완해나가는 노력도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 50인 미만 기업에서 안타까운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지금까지와 같이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중대재해법 위반 여부를 수사하게 된다"며 "해당 기업에서 위험성평가를 토대로 충분한 재해예방 노력을 했는지 면밀히 살펴 엄정하게 수사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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